지난달 열린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영화 ‘문라이트’에는 소위 ‘사내답지 못한 소년’이 등장한다. 3막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소년기의 ‘리틀’ 청소년기의 ‘샤이론’ 청년이 된 ‘블랙’은 다른 색의 같은 인물이다. 소심한 리틀이 아이들에게 매일 같이 얻어맞는 샤이론이 되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포기한 채 근육질의 마약상 블랙이 되기까지 그를 움직인 동력은 그 자신이 아니라 ‘계집애 같은 남자아이는 단죄해야 하는 사회’였다.
연극 ‘남자충동’의 주인공 이장정이 살아온 세상도 다르지 않다. 문라이트와 남자충동의 연식은 20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작품의 서사와 문법만 다를 뿐 각각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처한 폭력적인 상황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성인 장정의 성장기를 보여주지 않지만 장정의 독백을 통해 관객들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가 숱한 폭력을 견디며 자랐다는 사실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장정의 꿈은 ‘존경받는 가장’이다. 가부장제를 신앙으로 주입받은 탓이다. 방 한쪽을 차지한 영화 ‘대부’ 포스터 속 알 파치노는 그가 믿는 신앙의 시각화된 이미지다. 정작 그의 아버지는 놀음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어머니와 그를 시도 때도 없이 때리는 폭력 가장이지만 그의 신앙 속에 상징으로나마 존재해야 할 십자가 같은 존재다. 가정을 지키겠다는 핑계로 아버지의 손목을 자르고 남동생 유정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에선 그의 아버지가 겹친다.
조직폭력배가 된 장정에게 그의 조직은 가족과 다를 바 없다. 조직에선 그가 가장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그는 조직에서도 허점투성이 가장이다. 자신의 자폐 여동생을 탐내는 조직의 막내 달수를 두들겨 패고 친구에게마저 군림하려 든다.
가정이든 조직이든 폭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장정의 공동체는 위태롭기만 하다. 폭력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다. 아래로 향하던 폭력은 시간이 흐르면 반격을 받는다. 자식과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던 노름꾼 아버지는 장남의 칼에 손목이 잘리고 다른 조직의 조무래기 얼굴을 짓이겨놓은 조직폭력배 두목 팔득 역시 어둠 속에 두 손을 잃고 불구가 된다. 이것은 복선이다. 폭력으로 가족과 조직을 이끌던 장정에게 칼끝이 향할 수밖에 없다는 복선. 폭력 위에 세워진 질서와 평화는 허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라이트가 한 소년이 써내려간 푸른 빛 성장시(詩)라면 남자충동은 20세기 남성을 위한 핏빛 장송곡이다. 20세기를 살아간 숱한 남자들이 어려서는 ‘사내다움’에 짓밟히고 자라서는 ‘가부장제’의 판타지에 갇혀 살았다. 이들에게 보내는 이장정의 마지막 대사 “그래도 후회는 없다”는 반대로 ‘이장정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간절한 주문이다.
‘남자충동’은 조광화 연출이 1997년 집필해 초연을 선보인 작품이다. 조광화 연출의 데뷔 20주년을 맞이해 2004년 재연 이후 14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이번 작품은 그야말로 명불허전이다. 개막 전 기자간담회에서 조 감독은 “안석환(2004년 재연 당시 이장정 역) 이후 장정 역할을 맡을 배우가 마땅치 않아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없었다”고 했다. 앞으로 조 감독은 남자충동을 무대에 올릴 때 같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배우 박해수가 아닌 장정을 상상하기 어려운 탓이다.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이 씨 역을 맡은 손병호, 자폐 여동생 달래 역을 맡은 송상은, 달수 역으로 연극무대에 처음 선 울랄라세션의 멤버 박광선 등 각각이 자기 옷을 입은 듯 탄탄한 연기를 펼쳤다. 26일까지. 대학로 TOM 1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