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는 세바스티안 피녜라(67) 전 대통령이 지난 2014년 퇴임 이후 4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칠레 정권이 좌파에서 우파로 교체됐다. 경제난과 부패 스캔들로 최근 2년간 아르헨티나·브라질·페루에서 좌파정권이 줄줄이 몰락한 가운데 칠레에도 우파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지난 20년간 구축돼온 중남미 좌파벨트는 더욱 흔들리게 됐다. 내년에 멕시코와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주요국들의 릴레이 선거를 앞두고 최근 온두라스에서 우파가 재집권한 데 이어 칠레에서도 정권이 넘어가자 4월 에콰도르 대선에서 좌파정권이 재선에 성공한 뒤 주춤했던 ‘중남미 우클릭’이 다시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7일(현지시간) 칠레 선거관리위원회는 대선 결선투표에서 우파 야당 ‘칠레바모스’ 후보인 피녜라 전 대통령이 54.57%의 득표율로 45.43%의 지지를 받은 중도좌파여당연합 ‘누에바 마요리아’ 후보 알레한드로 기예르 상원의원을 꺾고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피녜라 전 대통령은 1999년 정계에 입문한 후 2010년 대통령에 당선돼 독재자였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대통령 이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칠레에서 우파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는 중남미 최대 항공사인 란(LAN) 등 대기업 지분을 대거 보유한 억만장자 사업가 출신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 포브스가 집계한 그의 자산은 27억달러(약 3조원)에 달한다.
피녜라 전 대통령의 당선은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좌파정권을 강타한 경제위기와 부패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무분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펴온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경제가 국제유가 급락으로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인 칠레에서도 원자재 가격 하락과 복지 부담으로 경제가 고꾸라지자 민심이 좌파정권에서 등을 돌린 것이다. 미첼 바첼라트 현 칠레 대통령은 자원시장 호황이 끝났음에도 대학 무상교육 서비스를 필두로 한 포퓰리즘 복지정책을 내놓았으며 그의 집권 이래 칠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에 머물렀다. 이는 피녜라 전 대통령 집권기에 5% 안팎의 성장세를 이어간 것과 대조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피녜라 전 대통령은 ‘경제재건’에 초점을 맞춘 공약을 내세우며 지지를 이끌었다. 법인세 인하와 정부 지출 축소, 중산층 지원 등을 약속하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남미 회원국 가운데 가장 먼저 선진국 지위를 얻겠다고 공언한 것이 대선 승리로 이어진 것이다.
피녜라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중남미에서의 좌파 퇴조 물결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2년 사이 아르헨티나와 브라질·페루에 이어 칠레까지 ‘핑크타이드(온건 사회주의 물결)’ 퇴조 대열에 합류하면서 내년에 줄줄이 예정된 선거에서 우파에 한층 힘이 실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중남미에서는 콜롬비아가 내년 5월, 양대 강국인 멕시코와 브라질이 각각 7월 10월에 대선을 치를 예정이다. 코스타리카와 파라과이도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다. 일각에서는 빈부격차가 심한 중남미 국가의 빈곤층과 지방 좌파세력의 결집을 예상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원자재 등 1차 산업에만 의존하면서 퍼주기식 복지정책을 이어간다면 민심의 외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변화에 대한 국민의 욕구가 피녜라 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며 “내년 중남미 주요국가들의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이번 칠레 대선은 남미 정치지형 변화를 볼 수 있는 일련의 선거 중 첫 번째 선거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