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로터리] 가인 김병로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이찬희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소송서류는 딱딱하다. 무엇보다도 사용되는 법률용어가 어렵다. 상대방과 날 선 주장을 주고받는 글에 온기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이런 일상에 지친 변호사들에게 지적 휴식을 제공하는 의미에서 매달 북 콘서트를 연다. 변호사회관 내 가장 큰 강의실이 가득 찰 정도로 참여가 뜨겁다.

이달에는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가 10년의 자료수집과 연구 끝에 발간한 역저 ‘가인 김병로’에 대한 북 콘서트를 열었다. 한 교수는 10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가인의 행적을 답사하면서 모든 상황에서 ‘가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시대를 넘어 가인과 소통한 열정이 책에 가득 담겨 있다.


가인 김병로는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사였고 해방 이후에는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법조인이다. 대법원장 퇴임 이후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저항한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단했기 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건국 초 우리나라 법률 제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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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법·사법·정치 등 다방면에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김병로에 대한 강연 중 가장 인상 깊게 들은 것은 호 ‘가인’에 관한 설명이었다. 가인의 뜻은 흔히 연상하는 아름다운 사람(佳人)이 아니라 거리의 사람(街人)이라고 한다. 거지나 노숙자라는 말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서 스스로를 한없이 낮추는 이런 겸손이 지금도 법조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꼽히는 이유일 것이다.

최근 대법원 법원행정처의 판사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PC 개봉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판사들의 익명 게시판 글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기도 했다. 실체적 진실 발견과 절차적 타당성 확보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렵지만 현재 법원 내부에서 진행되는 상황은 국민들이 사법부를 불신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선배 법관 가인 김병로라면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법권 독립은 외부로부터의 독립만큼 조직 내부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하다. 판사들이 법원 내부조직으로부터 재판과 관련한 압박을 받아서는 안 된다. 스스로 권력에 줄대기를 하면서 재판에 영향을 줘도 안 된다. 그래야 가인이 만들고 지켜낸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사인 것이다.

가인처럼 생각하기는 국민들에게도 적용돼야 한다. 여론 눈치를 보는 판사도 문제지만 판사로 하여금 여론 눈치를 보게 하는 국민도 문제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판결마다 판사 신상을 터는 국민 앞에서 어떤 판사가 오로지 법과 양심에만 따라 재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혼란스러우니 가인 정신이 더 절실하게 그리운 시절이다.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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