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문재인 정부의 ‘홍길동 구조조정’

김영필 경제부 차장

김영필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 업무를 맡았던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은 ‘두주불사’였다. 하루에 폭탄주를 수십 잔씩 마셨다.

그는 매일 기자를 만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반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구조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입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명확한 원칙과 소신, 그리고 신뢰가 필수다. 당시 기업 구조조정 5원칙을 만든 이 전 위원장도 신뢰를 중시했다.


외환위기 후 20여년. 숱한 기업이 죽고 살아났다. 대우는 공중 분해됐지만 하이닉스는 되살아나 국가 경제에 효자가 됐다. 한진해운처럼 허망하게 사라진 기업도 있다. 중소기업은 매년 수백 개가 금융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논란은 있지만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린다’는 큰 원칙이 유지돼왔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그런데 최근의 구조조정을 보면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 죽여도 죽인다고 말을 못한다. 지난 8일 나온 성동조선 구조조정 방안에는 향후 처리 방향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무려 784자다.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업체인데 내용은 장밋빛이다. ‘사업 전환 및 인수합병(M&A)’ ‘다양한 회생 기회’ 등.


금융권에서는 ‘D등급’이라고 쓰고 ‘퇴출’로 읽는다. 금융감독원은 ‘D등급’을 ‘부실징후기업 앤드(and) 경영정상화 가능성 저(低)’라고 설명한다. 법정관리에서 살아 돌아오는 기업은 20%가 채 안 된다. 십중팔구는 생을 마감한다. 성동이 기적적으로 회생할 가능성도 있다. 기자도 그것을 바란다. 하지만 성동이 수리 업체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선박 제조를 하던 성동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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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한 번 더 얻은 STX조선해양도 마찬가지다. 인력 ‘40%+α’ 감원 조건이다. 업계에서는 “껍데기만 남긴다”고 한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예전 같았으면 지금의 STX나 성동은 바로 퇴출”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퇴출은 금기어가 된 듯하다. 일자리 정부 프레임에 갇힌 탓이다. 일자리와 지역 경제를 고려한다는 신(新)구조조정 방안은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처럼 죽여도 죽인다고 말을 못하는 해괴한 구조조정을 만들어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다. 옛 기아자동차를 비롯해 구조조정이 지연되면서 한국 경제는 신뢰를 잃었다. 구조조정의 핵심도 신뢰다.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린다는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구조조정에는 신뢰와 원칙이 보이지 않는다. 선무당인 산업통상자원부나 나서지 않는 금융위원회, 눈치만 보는 기획재정부 모두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앞으로 한국GM과 금호타이어 같은 파급력이 큰 건들이 남아 있다. 미국의 통상 압력과 금리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업체는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경제팀에 묻고 싶다. 손에 피를 묻힐 준비가 돼 있는가.
/susopa@sedaily.com

김영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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