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리뷰-영화 '버닝'] '버티는 청춘'이 잊고 있던 삶의 의미

개발과 자본 상징이 된 강남과

농촌 풍경 어우러진 파주 대비로

팍팍한 청춘의 노스탤지어 담아

이창동 감독 첫 미스터리 도전




지도에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를 점 찍는다. 서울 서북쪽 최대 규모의 신도시 일산, 그다음으로 개발된 운정신도시에서 10여㎞ 떨어진 곳. 이곳은 이창동 감독이 8년만에 내놓은 신작 ‘버닝’에서 종수(유아인)의 터전이자 종수와 해미(전종서)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개발의 목전에 놓였으나 여전히 농사가 일상이고 도시와는 달리 너른 하늘의 해질녘 노을과 새떼를 발견할 수 있는 곳. ‘버닝’에서 이 감독이 보여주는 고민과 주제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이 감독은 전작 ‘초록물고기’(1999)에서 신도시 개발로 밀려난 아카시아밭 ‘일산’을 비춘다. 자본과 노스탤지어가 공존하는 공간에서 공동체와 인간의 순수성을 꿈꿨던 주인공 막동(한석규)이 죽음을 통해 살려낸 가족애가 미약하나마 살아남은 곳. 그곳에서 멀지 않은 파주의 한 근교농촌에서 이 감독은 다시금 현재의 청춘이 품은 노스탤지어를 담는다.






감독과 출연배우 모두 이구동성으로 설명한 대로 작품은 시종일관 “미스터리 하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무엇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종수는 어릴 적 집을 떠난 어머니와 공무집행방해, 폭력 등으로 구속수감된 채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도 무너진 가정을 부여잡은 채 꿈도 희망도 없는 현재를 버티며 살아간다. 그는 우연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해미를 만나지만 얼굴마저 변해버린 해미에 대한 기억은 부정확하다.

해미와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벤(스티븐 연)은 더욱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카드빚 때문에 가족에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산타워가 보이는 단칸방에 살며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여행하는 해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동시에 망각과 욕망 속에 희미해진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다. 이들과 달리 서울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살고 고급 스포츠카를 몰며 풍족한 삶을 누리는 벤은 취미로 쓸모없고 지저분한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낀다.



“다른 방식으로 말 걸기를 시도하고 싶었다”던 이 감독은 처음으로 ‘미스터리’ 장르에 도전했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영화의 메타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한 이야기 방식일 뿐 이 영화는 이 감독이 전작들을 통해 보여줬던 고민과 주제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종수의 공간인 파주와 벤의 공간을 대비시키는 것부터 상징적이다.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벤이 개발과 자본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평소 바람대로 노을처럼 사라지는 해미는 현대인이 망각한 노스탤지어다. ‘초록물고기’에서 그려진 자본과 개발의 표상이 위악적이었다면 ‘버닝’에서는 세련되고 치밀하다. 이들 사이에서 벤을 질투하고 그에게 주눅 드는 동시에 정체도 잘 알지 못하는 해미를 사랑하는 종수는 현재에서 답을 찾지 못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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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모순 속에 소용돌이치는 개인의 삶을 배치했던 이 감독은 오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공권력에 희생되고 눈에 보이는 폭력을 견뎌야 했던 시절 대신 청년 실업률이 OECD 최고 수준으로 오르고 있다는 뉴스가 새삼스럽지 않은 시대에 꿈이나 삶의 의미를 좇는 것은 사치이며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개발 논리가 통용되는 지금을 비춘다.

“나를 덜어내고 인물을 담아내는 과정이었다”는 전종서의 말대로 거장을 만난 배우들은 캐릭터에 스며들어 인물 자체를 보여준다. 낡은 가족사진부터 누추한 가구들이 두서없는 종수의 집은 물론 눈이 시린 파주의 해질녘 풍경과 바람, 흔들리는 나무소리와 새떼엔 거짓 한 줌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이제 최대 관심사는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버닝’의 수상 여부다. 지난 2010년 이 감독이 영화 ‘시’로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후 한국감독의 수상이 없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수상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 영미권 온라인 영화 매체인 ‘아이온 시네마’가 집계한 평점은 3.9점으로, 현재 공개된 경쟁작 중 가장 높다. ‘버닝’을 포함 총 21편이 경쟁부문에 진출한 가운데 영화제 폐막일인 19일(현지시간) 수상 여부가 가려진다. 국내 개봉 17일


서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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