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으로 산업정책의 범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좁아졌다. 과거에는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주거나 특정 기업에 시장지배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특히 보건·안전·환경 등의 이유로 자국 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제품의 기술규정이나 표준을 정함으로써 외국 기업의 국내시장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도 했다.
제품이 판매되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의 기술적 특성이 시장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생산 방법과 소비자안전 등에 대한 요건은 국가마다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자국 기업에 유리하게 규정하는 경우가 많아 심각한 무역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비관세장벽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하에서 규범 도입이 논의되기도 했으나 실효를 보지 못하다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무역기술장벽(TBT) 협정이 합의됐다.
TBT 협정의 골자는 기술규정이 무역장벽화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국제표준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채택하도록 하는 의무를 WTO 회원국들에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후나 지리적 요소 등 특수한 상황이 있을 경우 개별국은 별도의 기술규정을 설정할 수 있도록 허용함에 따라 TBT의 무역장벽화 가능성을 남겼다. 다만 기술규정 남용을 줄이기 위해 새로 채택하는 기술규정이나 표준이 관련 분야의 국제표준에 없거나 국제표준과 다를 경우 이해 당사국이 숙지하고 대응할 수 있도록 간행물에 공표하고 WTO TBT 사무국에 통보하는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국제표준이 없는 분야에 대한 TBT 통보는 문제 될 것이 없으나 나머지 경우에는 보호무역주의적 입장에서 새로운 기술규정을 도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최근 개발도상국들의 TBT 통보 건수가 늘어나는 것을 우려하는 이유이다.
지난해 WTO TBT 통보 건수는 역대 최고치인 2,585건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1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들 신규 통보 중 선진국과 개도국이 각각 16%와 84%(최빈국 21% 포함)를 차지하고 있고 선진국에 비해 개도국의 통보문이 5배 이상으로 많다. 그나마 지난 2017년의 경우 개도국의 통보 비중이 전년 대비 다소 감소했다. 신규 통보 건수가 많은 개도국은 중국·인도·베트남·페루·칠레·우간다·탄자니아·예멘·잠비아·르완다 등이다.
기술규정이나 표준 변경으로 하루아침에 수출선이 막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2013년 초 베트남은 에너지효율 인증 제도로 모든 수입 전기가전제품의 에너지효율 인증을 의무화했다. 에너지효율 인증은 흔한 제도지만 6개월마다 인증을 받아야 하고 인증 절차에 10주가 소요되며 턱없이 비싼 비용으로 베트남 내에 지정된 몇 개의 시험소에서만 시험성적표를 발부하도록 돼 있어 수출기업에는 심각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기술표준기관인 국가기술표준원이 베트남 측과 협상해 국내 기업에는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앞으로도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TBT는 사실상 민관 공동대응과 합동작전이 필요한 정보전이고 통상외교전이다. 해외에 진출한 기업들은 현지 시장이나 정부가 추진하는 기술표준 움직임을 파악해 국내 국가기술표준원과 정보를 공유해야 하고 정부는 양자 및 다자 채널을 이용해 불리한 규정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WTO TBT 통보 건수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보호무역주의가 확산하면서 많은 국가가 기술규정과 표준을 이용하고 있다. 심지어 산업 기반이 없는 경우에도 까다로운 규정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에서의 기술 선점을 위해 경쟁적으로 기술규정을 통보할 가능성이 예상된다.
국내외 기술규정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 개선과 함께 기술표준원의 역량을 확충함으로써 높아지고 있는 TBT 파고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또 해외에 있는 우리나라 공관이나 KOTRA 등 무역 관련 기관들도 기술규정과 TBT 정보를 수집하고 정책기관과 공유하는 공동대응 체제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