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통상임금 이젠 노조의 신의칙을 바란다

김현수 산업부장

협약자치로 이룬 합의 뒤집는건

회사 망해야 소모전 멈추자는것

대승적 결단없인 미래 장담못해

김현수



법원이 기아차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또다시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에도 노조의 요구는 기아차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인 만큼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통상임금 소송은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구조는 간단하다. 과거의 약속을 깨고 소급해 임금을 요구하는 노조의 주장에 ‘경영상의 어려움’이라는 잣대를 적용하며 복잡해졌을 뿐이다.


애초 노사는 지난 1988년 정부가 예규로 정한 행정지침(통상임금 산정지침)에 따라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를 깨고 통상임금 소송이 여기저기서 터진 것은 2013년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며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초래될 경우에는 신의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면서부터다. 물론 대법원은 경영상 어려움에 대해 ①실질 임금인상률이 교섭 당시 예정한 인상률을 훨씬 초과하고 ②예상치 못한 과도한 지출이 예상되며 ③순이익의 대부분을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사정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단서가 제대로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시영운수의 통상임금 상승률이 29.1%로 기존 인상률(3.5%)의 8배에 달하고 추가 지출액이 최근 3년 순이익의 623%에 달하고 있다. 추가 인건비로 1조원에 가까운 충당금을 쌓은 기아차가 예상치 못한 과도한 지출이라는 조건에 왜 해당하지 않는지도 묻고 싶다. 경영상의 어려움이라는 신의칙의 단서를 법원이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기아차는 비용 지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 1조원의 인건비를 충당금으로 쌓은 후 신용등급에 경고를 받았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지난해 영업환경과 비용압박을 이유로 기아차의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강등했다. 만약 이후 신용등급이 낮춰진다면 기아차는 자금조달은 물론 판매에서도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지표 몇 개만으로 경영상의 어려움을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다수의 법학자들의 의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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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임금 소송에서 대부분은 돈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인건비 지급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사관계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노사관계는 노동법에 규정된 ‘협약자치’를 가지고 있다. 노조의 요구가 정당하다면 회사는 수용해야 하고 회사가 어려우면 노조가 양보할 수 있는 공존의 틀에서 이뤄진 합의는 존중돼야 하고 법원도 쉽게 무효화시킬 수 없다. 30년 전 합의된 내용을 신의칙 잣대에 따라 법원이 이리저리 판단해버리고 기업이 망해야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든다면 앞으로 노사는 협약자치를 잃고 모두 법원의 판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신의칙 적용은 구체적인 지침에 따라야 한다. 다시 한 번 대법원 전원 합의체를 통해서라도 사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당장은 경영상의 어려움에 경영지표뿐 아니라 해당 산업의 경쟁 상황과 기업의 경쟁력 확보 관점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의견이다.

노조 입장에서도 이번 소송에서 이겼다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통상임금 소송마다 ‘노동으로 회사가 누린 이득의 정당한 요구’라는 주장을 하며 ‘경영상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 위태’ 등을 호소하는 사측과 맞부딪히는 소모전에 노사 모두 지치고 있다. 갈등이 아닌 합의를 위해서라도 신의칙 인정 여부에 대한 확고한 법리적·사회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

11일 최준영 기아차 대표는 노조에 “통상임금 논란을 끝내자”고 호소하며 임금 인상을 감수하는 회사 측 안을 제시했지만 노조의 거부로 무산됐다. 지난해 기아차의 영업이익률은 2.1%로 글로벌 경쟁사들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한다. 영업이익률 저하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인건비가 꼽힌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국내 완성차 5개 기업의 평균 연봉은 9,072만원으로 일본의 도요타(8,503만원), 독일의 폭스바겐(8,340만원) 등보다 훨씬 높다. 인건비만 놓고 봐도 국내 자동차산업의 생산성 회복은 쉽지 않다. 자칫 이러다 미래차 생산기지를 모두 해외에 빼앗길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해마다 감소하는 영업이익률을 몸으로 느끼고 있을 노조도 이제는 신의칙에 따라 대승적 판단을 해야 한다. /hskim@sedaily.com

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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