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닥종이로만 작업하던 정창섭(1927~2011)은 작고 후에야 비로소 ‘단색화’라는 이름의, 물성(物性)의 예술로 미술시장의 재조명을 받았다. 뒤늦게 프랑스와 벨기에 화랑들이 앞다퉈 소개하고 있는 정창섭의 미공개작 ‘묵고’ 시리즈가 벽에 걸렸다. 귀한 수작(秀作)은 이뿐 아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한창이고 화이트큐브, 페로탱갤러리 등 세계 정상급 화랑들이 전속작가로 ‘모셔간’ 박서보의 1990년대 ‘묘법’들도 다양하게 걸렸다. 최근 해외 평단에서 ‘한국의 고흐’라 불린 김종학은 83세 고령이 무색해지는 18m 크기 신작을 내놓았다.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특별전이 한창인 윤형근, 이강소의 대표작도 만날 수 있다. 부산시 해운대구 달맞이길의 조현화랑이 기획한 ‘개관 30주년 기념전’이기 때문이다.
부산에 기반을 두면서 정체성 분명한 한국화랑으로 해외에서도 명성을 쌓고 있는 조현(사진) 조현화랑 대표를 지난 1일 서울경제가 단독으로 만났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명성에 걸맞은 문화도시로 발전한 부산에서, 해운대구 달맞이길을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명소로 만들고, 부산에 기반한 ‘아트부산’이 국내 양대 아트페어로 급성장하는 토양을 마련하고, 김종학·이배 등의 거장이 국제무대에서 주목받게 한 그 모든 배경이 된 조현화랑이다.
조 대표가 지난 1989년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 처음 연 화랑은 ‘갤러리 월드’. 세계를 겨냥한 야심찬 이름이었다. 자신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꾸린 개관전에서 조 대표는 보람 대신 큰 충격을 받았다. 직접 구입하거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명 작품들을 자랑스럽게 걸었건만 그 중 3분의 1이 ‘가짜’라는 소리를 들었다. 개관전을 황급히 마무리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조 대표는 “자존심도 크게 다쳤기에 주변 지인과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했다”면서 “모노크롬 작가인 김홍석(1935~1994) 선생 등이 외국화랑의 운영방식을 공부해보라고 해 가까운 동경화랑부터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하게 배우면서 다시 시작할 준비를 했다”고 말했다. 1980~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현대미술을 유통하는 화랑업은 걸음마 단계였다. 조 대표는 해외 화랑의 사례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을 정립했고 새로운 작가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화랑은 ‘창고형 화랑’ 아니면 ‘딜러형 화랑’입니다. 컬렉션(소장품)을 중시하는 ‘창고형 화랑’은 먼 장래를 내다보고 ‘딜러형 화랑’은 수수료 수익이 실속있죠. 당시 부산의 상황까지 고려하니 ‘나는 창고형’이라는 결론이 딱 나오더라고요. 고향에서, 죄다 아는 사람한테 팔아야 하는 것인지라 내 소장품을 산다는 마음으로 멀리 보고 신중하게 접근하며 다시 화랑을 열었습니다.”
가짜를 구입했던 호된 경험은 비싼 수업료가 됐다. 조 대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조현화랑’으로 다시 시작했다. 1991년 박서보를 시작으로 윤형근·정창섭 등의 단색화 작가를 부산에 소개했고, 일찍이 아방가르드와 개념미술을 선보인 이강소, 한국화의 전통과 민화적 색채·구성을 독창적 안목으로 그려낸 김종학 등을 전시했다. 그는 “단색화가 의외로 부산 사람들의 기질에 맞는 작품이었던지 꽤 잘 팔렸다”면서 “20여 년 전 당시 100호가 최대 1,500만원 정도였고 2,000만원을 넘지 않는 정도였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단색화는 2015년을 전후로 국내외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으며 최소 10배 이상 값이 뛰어 수억원을 호가하게 됐으니 고객들 볼 ‘면목’이 생겼다.
1999년에 해운대로 이전한 후 2007년에 현재 위치로 신축이전한 조현화랑은 가는 곳마다 ‘명소’를 만든다. 부산을 대표하는 ‘지역 화랑’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조 대표는 “지역 화랑의 한계는 전혀 없다”고 말한다.
“서울 고객이 부산까지 찾아와 작품을 구입하는 시대잖아요. 고객의 절반이 서울 분들이고 나머지의 절반은 외국인입니다. 인터넷으로 해외에서도 우리 화랑 소식을 다 찾아보니까요. 특히 5~6년 전부터 미술시장의 세계화 경향이 피부에 와 닿았고 서울 청담점도 더 이상 필요없다 싶어 문을 닫았습니다. 다른 갤러리가 갖지 못한, 우리 조현화랑 만의 작가와 작품이 있으면 고객들이 찾아오거든요.”
조 대표는 20년 전 이우환 화백과의 일화를 들려줬다. “지방에 있는 화랑”이라 푸념했더니 대뜸 이 화백이 “화랑이 어디에 있는지가 뭐 중요하냐”며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 디종에 있는 한 갤러리를 가보라고 했다. 광활한 벌판 한가운데 농협창고 같은 곳이 갤러리였는데, 현관에 붙은 전화번호로 연락하자 사장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살짝 비웃었건만 그가 열어준 전시장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안토니 곰리, 수보드 굽타 등 거장의 초대형 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갤러리는 와인 수확기에만 전시를 열어 와인을 ‘밭째’ 구매하는 안목·취향·재력을 겸비한 고객들에게 작품을 판다고 했다. 조 대표가 소신있고 색깔있게 화랑을 운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그럼에도 조 대표는 늘 조심스럽고 언론 인터뷰도 극도로 꺼린다. 국회의원 출신 남편의 유명세 때문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으나 진짜 이유는 ‘화랑 본업’ 때문이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정치학자들의 말을 빌려 조 대표는 “미술품도 생물”이라 했다.
“화랑 일 10년쯤 하니 ‘미술품도 살아있는 생물’이더군요. 팔면 끝나는 공산품, 소모품과 달리 언젠가 돌아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 미술품입니다. 나는 죽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후대와도 만나는 것이 작품이니까요. 고객에게 판 그림이 언젠가 내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임감있게 거래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술품 거래는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작품에 관해 지금 모든 걸 장담하듯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덫에 걸릴 수도 있기에 인터뷰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만은….”
자신이 판 작품의 앞날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도 조 대표는 큰 그림을 판 날 밤잠 설치는 일이 종종 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조현화랑의 국제적 행보는 거침없다.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 홍콩에 참가하고, 유력한 해외갤러리와도 직접 협력한다. 경쟁력은 ‘우리 작가’이다.
“30년 화랑일 하고 보니 우리 작가를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터득했습니다. 내(나라) 작가가 딴딴하지 않으면 화랑은 흔들리게 됩니다. 외국작가에 대한 선호·동경이 있지만 우리 작가를 외국에 팔아야지 해외작품 갖고 들어오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게다가 세계화 물결 속에 해외화랑들이 한국에 분점을 열고 있는 상황이니 경쟁력이 더 떨어집니다. 거기서 사지 왜 우리에게 와서 사겠나, 내 밑천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최근 조현화랑은 작가 다변화와 함께 국내 젊은 작가 발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미술시장은 시간 싸움입니다. 좋은 작가가 좋은 작업하면서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한다면, 시간만 버텨내면 반드시 좋은 평가를 얻어냅니다. 앞으로도 작가들, 작품들과 함께 살아갈 겁니다.”
/글·사진(부산)=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