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촉발한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지 40여일이 지났지만 반대 목소리는 여전히 높습니다. 플로이드 사망 초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평화 혹은 시위로 나타났다면, 현재는 ‘언어’로 옮겨진 모양새입니다. 구글과 트위터, JP모건 등 대기업들이 그간 사용했던 인종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변화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이트리스트→얼로우리스트…테크업계의 변화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정보기술(IT) 업계입니다. 3일 BBC에 따르면 트위터는 현재 ‘마스터(master)’와 ‘슬레이브(slave)’, ‘블랙리스트(blacklist)’, ‘화이트리스트(whitelist)’와 같은 프로그래밍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트위터 엔지니어링 부서는 트위터를 통해 보다 포용적인 언어를 사용하겠다며, ‘화이트리스트’를 ‘얼로우리스트(allowlist)’로, 마스터와 슬레이브를 각각 ‘리더’와 ‘팔로워’로 교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이클 몬타노 트위터 엔지니어링 팀장은 지난달 25일 트위터의 모든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포용적 언어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존엄하고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추구한다”며 “모두를 그룹 안으로 끌어들이며 누구도 배제하지 않도록 구성됐으며, 모두가 환영받는다고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글로벌 IT 전문 매체 씨넷(CNET)은 이 같은 움직임이 지난 1월부터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개발 사이트인 깃허브(GitHub)도 코딩 언어에서 ‘마스터’라는 용어를 변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소유하고 있는 깃허브는 5,000만 개발자들이 코딩 프로젝트를 저장하고 업데이트하는데 사용됩니다. 구글의 크롬 웹브라우저 프로젝트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도 개발자들에게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장려했습니다. 구글은 2018년 5월부터 크롬에서 이들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블랙리스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죠. 애플의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존 윌랜더는 트위터를 통해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라는 용어를 버렸다며, 이를 ‘블록리스트(blocklist)’와 ‘얼로우리스트’로 바꿨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JP모건도 구시대적인 코딩 용어들을 삭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화이트는 긍정적·블랙은 부정적…이것도 인종차별
IT업계가 이들 용어를 변경하기로 한 것은 백인을 뜻하는 화이트가 포함된 ‘화이트리스트’는 긍정적인 의미가 담긴 반면 흑인을 뜻하는 블랙이 포함된 ‘블랙리스트’는 부정적인 의미를 뜻하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주인을 뜻하는 마스터와 노예를 뜻하는 슬레이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역시, 과거 흑인 노예제도가 있었던 미국의 역사를 고려할 때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됐죠.
이 같은 움직임이 이번에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이 같은 용어를 퇴출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지난 2018년 파이썬 프로그래밍 언어 개발자들은 마스터와 슬레이브 용어를 삭제했죠. 4년 전 온라인 출판 소프트에어인 드루팔의 팀은 마스터와 슬레이브 대신 ‘프라이머리(primary)’와 ‘레플리카(replica)’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테크업계는 대체로 화이트리스트는 얼로우리스트로, 블랙리스트는 디나이리스트(denylist)나 블록리스트로 변경하고 있습니다. 마스터는 리더(leader)나 프라이머리로, 슬레이브는 팔로워(follower)나 레플리카, 스탠바이(standby)로 바꾸는 식입니다.
화이트닝·에스키모…일상 속 인종차별 용어 퇴출해야
인종차별적인 용어를 퇴출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은 제품과 관련한 문구에서 화이트닝(whitening)과 같이 하얀 피부를 강조하는 단어들을 없애겠다고 밝혔죠. 이번 결정에 따라 앞으로 로레알 화장품에서 ‘흰(white)’, ‘밝은(fair)’, ‘환한(light)’ 등의 단어는 보지 못하게 될 전망입니다.
스위스 최대 종합식품 회사인 네슬레는 캐러멜류 제품인 ‘레드스킨스(Red Skins)’와 초콜릿 맛 젤리 ‘치코스(Chicos)’의 상품명을 바꾸겠다고 밝혔습니다. 레드스킨스는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으로 정착한 유럽인이 원주민을 부를 때 쓴 경멸적 표현이며, 치코스는 라틴계 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담은 단어죠. 네슬레는 콜롬비아에서 판매 중인 마시멜로 ‘베소 데 네그라(Beso de Negra)’의 이름도 바꿀 예정인데요, 이는 흑인 여성의 키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약 100년의 역사를 지닌 미국 아이스크림 ‘에스키모 파이’를 판매하는 드라이어스 그랜드 아이스크림이 에스키모가 경멸적인 표현임을 인정한다며 브랜드명을 바꾸겠다고 밝혔습니다. 우리도 흔히 사용하는 에스키모는 알래스카 원주민인 이누이트(Inuit)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날고기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흑인 여성의 얼굴을 로고로 써온 팬케이크·시럽 브랜드 ‘앤트 제미마’, 나비넥타이를 맨 흑인 남성 노인의 이미지를 사용했던 ‘엉클 벤스’도 브랜드명과 로고를 수정하겠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스포츠계에서도 인종차별적 용어에 대한 논란은 뜨거운데요, 프로미식축구팀인 워싱턴 레드스킨스의 스폰서 페덱스는 팀명을 변경할 것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페덱스는 지난 1999년부터 시작된 레드스킨스와의 후원 계약에 따라 2억500만달러(2,461억원)를 지불한 스폰서로, 레드스킨스의 홈구장도 ‘페덱스필드’입니다. 페덱스의 최고경영자(CEO)인 프레드릭 스미스는 레드스킨스의 소수 소유주이기도 하죠.
당신의 말은 당신의 행동이 된다
이 같은 변화에도 물론 한계는 있을 겁니다. 씨넷(CNET)은 “아무도 테크놀로지 언어를 바꾸는 것이 미국에 인종적인 평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이처럼 기술이 논의되는 방식을 바꾸려는 노력은 얼마나 인종차별이 만연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프로그래밍 용어 몇 개를 바꾼다고 해서 인종차별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런 노력이 인종차별을 해소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죠.
민권 단체인 남부 빈곤 법률 센터의 레시아 브룩스 역시 “발신자의 입장에서 단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수신자에게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좀 더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작은 공격들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문서 업체인 슬라이트의 부사장 마이크 바틀렛은 이 같은 움직임을 지지하기 위해 트위터를 통해 마하트마 간디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신념은 당신의 생각이 되고, 당신의 생각은 당신의 말이 되고, 당신의 말은 당신의 행동이 되고, 당신의 행동은 당신의 습관이 되고, 당신의 습관은 당신의 가치가 되고,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운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