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아직 표현되지 않은 언어의 소중함

작가

하루종일 수많은 대화 나누지만

진정 하고싶은 말은 못하는 현대인

아직 표현하지 못한 내면의 언어

글쓰기 통해 풀어보는 건 어떨까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내가 진짜로 원하는 말을 제때, 꼭 들어맞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하루에 그토록 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늘 열심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 사람 앞에서는 내가 해야 할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한다. 내가 끝없이 책을 읽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바로 그 말’을 책 속에서 찾아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아닐까. 누구를 좋아한단 말도, 누구를 싫어한단 말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그 모든 표현이 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생각은 많지만 표현이 어려운 사람들, 넘쳐나는 생각을 정리된 언어로 말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심금을 울린다.


정용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말을 더듬는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열네 살 소년의 목소리로 이 ‘표현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절절히 느끼지만 모든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이 소년에게는 사랑도 우정도 아주 사소한 일상적 소통도 어렵다. “사람들은 줄줄 말을 참 잘해. 써도 써도 넘치는 말의 바다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어. 플라스틱 수조 같은 곳에 한 모금 정도의 물만 바닥에 남아 있거든.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사람도 있어. 수조가 깨진 사람도 있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사람도 있어.” 아무도 날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으니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열네 살 소년의 굳은 결심은 가슴 시리도록 아프다. “하늘 끝까지 헹가래질하다가 마지막에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웃게 만든 다음 울게 만들 거잖아. 줬다가 뺏을 거잖아. 내일이면 모른 척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다 그렇잖아.” 하지만 언어치료를 통해 조금씩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가는 소년의 이야기는 내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내면아이의 아픔을 조용히 일깨운다. 우리 안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사랑과 슬픔과 성찰과 자유의 언어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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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표현의 무지막지한 어려움을 매일 체험한다. 더 많이 읽고 쓸수록, 더 깊은 표현의 어려움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나는 표현의 소중함뿐 아니라 ‘표현되지 않은 언어’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표현하지 못한 그 수많은 언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수많은 슬픔, 그 맵고 짠 눈물방울들. 그 굽이굽이 파란만장한 말 못할 사연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모든 사랑의 언어와 분노의 언어가 마치 마그마처럼 우리 마음의 지표면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다가,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 터지게 하는 것보다는 조금씩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 표현하며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루 종일 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언어를 접하지만 정작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문장을 단 한 줄도 만나지 못할 때도 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지만 결국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단 한 문장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할 때도 있다. 아직 표현하지 못한 수많은 상처들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면에서 저마다 다른 이유로 고통스런 언어장애를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

나는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이 ‘표현되지 않은 언어의 보물창고’를 매일 갈고 닦으며 살아간다. 글쓰기야말로 말하기의 패자부활전이다. 말하지 못한 언어들을 글로 표현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강해진다. 어제 당신에게 내가 하지 못한 말, 10여년 전 끝내 그 사람에게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이 모여 언젠가는 아름다운 글이 되기를. 말하지 못한 그때 그 감정과 그 사연을 기억의 쓰레기통에 처박을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이야기일수록 더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모여 마침내 아름다운 글 한 편이 된다. 우리는 끝없이 말을 더듬는(stammering) 수줍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끝없이 말을 다듬는(polishing) 눈부신 존재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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