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이사람]'페이커' 이상혁 "은퇴는 게임이 재미없어지는 날…아직은 게임이 재밌다"

롤드컵 트로피 3번·국내 리그 9번 우승

메이저 국제 경기서 통산 100승 첫 달성

독보적인 실력 뽐내며 자타공인 '롤 황제'

올 롤드컵 진출실패에 비판 쏟아졌지만

'부처' 별명처럼 부담 떨치고 마음 다잡아

프로 꿈꾸는 후배에 "그랜드마스터 찍어라"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저는 T1에서 프로게이머로 활동하는 ‘페이커(Faker)’ 이상혁입니다.”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말에 군더더기 없는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살짝 창백한 피부에 가지런한 손가락. T1 유니폼을 툭 걸치고 슬리퍼를 끄는 앳된 얼굴의 이상혁(24) 선수. 만 16세에 데뷔하자마자 전 세계 1억명이 즐기는 인기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왕좌를 차지한 작은 거인이다. 그는 모든 게임 팬들의 우상이다. “한국은 몰라도 페이커는 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그의 인기는 이미 한국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서울 강남구 T1 사옥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백전노장’ 이상혁을 만났다.

이상혁은 e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커리어를 쌓은 선수다. 최고 권위의 대회인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우승 트로피만 3번 들어 올렸다. 한국 리그인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에서 9번 우승했고 국제대회인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MSI)’ ‘리프트 라이벌즈’에서 총 3번 우승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선수들 중 처음으로 메이저 국제전 통산 100승을 달성한 대기록의 주인공이다. 게임 개발·운영사 라이엇게임즈가 주관하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한 유일무이한 선수이기도 하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그렇기에 최근 그에게 붙은 ‘부진’이라는 꼬리표는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올해 LCK 서머 시즌에서 이상혁이 속한 팀 T1은 롤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지난 2014년과 2018년에 이어 세번째다. 페이커는 그때마다 보란 듯 다음 시즌에 기량을 회복해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이번에도 그는 의연한 모습으로 전의를 다지는 모습이었다. 이상혁은 “여러 번 실패와 좌절을 겪다 보면 그 과정에서 다음에 어떻게 하면 부담감을 떨쳐내고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경험들을 하다 보니 최근에는 마음가짐이 더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혁은 지난달 31일 롤드컵 결승전에서 LCK가 3년 만에 트로피를 탈환한 데 대해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며 “내년에는 반드시 우승하고 싶다”고 의지를 내비쳤다.

이상혁은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 선수로 자리매김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동시에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수많은 평가와 가혹한 비판을 들어야 했다. 조금만 실수해도 몇 배 더 혹독한 비난이 그에게 돌아왔다. 압도적인 부담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물었다. “어떤 분야든 최고의 자리에 있다 보면 굉장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저 역시 그랬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랫동안 쌓아온 경력으로 최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대처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게임 중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을 항상 유지해 ‘부처’나 ‘로봇’으로 불리는 이상혁다운 대답이다.

이상혁은 지나온 자리를 되돌아보지 않는 편이다. 짜릿하게 승리한 경기도, 아프게 패배한 경기도 복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복기하는 것도 좋지만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나에게 좋은 점들만 짧게 가져가고 안 좋은 것들은 빨리 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의 일상과 생각은 오로지 게임에만 맞춰져 있다. 이번 롤드컵 공식 주제곡 ‘테이크 오버’ 뮤직비디오에서 페이커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스토리를 이끌어 화제가 됐지만 그는 “찾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남들을 깎아내리면서 희열을 얻는다는 이유로 인터넷 커뮤니티 여론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한국은 스타크래프트가 대세였던 시절부터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한 선수를 다수 배출한 ‘e스포츠 강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풍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중국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상혁은 “한국 e스포츠의 위상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은 1980~1990년대 인터넷이 빠르게 확산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PC방’ 문화를 꽃피우며 e스포츠 강국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초고속인터넷과 PC가 보급돼 어느 나라든 뛰어난 프로게이머를 키워낼 상황이 됐다. “앞으로도 한국이 뒤처지는 일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고 보고 그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방향을 찾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 e스포츠를 향한 그의 조언은 게임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본질적 차원에서 나왔다. 이상혁은 “중국 자본력이 우수하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 인재가 많고 한국 e스포츠 시장이 선수들에게 좋은 환경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만 e스포츠 선수를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게임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보다 많이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만 팽배하고 학문적 토대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e스포츠의 발전 역시 이룰 수 없다는 통찰이다.



이상혁은 줄곧 한 팀과 의리를 지켜온 T1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백지수표를 건넨 중국, 수백억대의 연봉을 제시했다는 유럽 등 세계 각지 리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T1 그리고 LCK의 상징으로 남는 것을 택했다. 그는 “LPL(LoL professional league·중국 LoL 프로 리그)에 갔더라도 많은 중국 팬분들이 좋아해 주시기에 어떻게든 잘됐을 것”이라면서도 “이미 지나간 일이라 ‘중국에 갔다면 어떨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선수가 서울 강남구 T1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성형주기자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뭘까. 승리의 쾌감, 어린 나이의 성공. 모두 아니다. 바로 ‘재미’다. 그는 “지금도 게임이 재밌다”며 “오랫동안 해왔지만 게임이 재밌으니까 그만큼 오래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하루 연습량만 10~14시간. 8년을 살얼음 같은 프로게이머 필드에서 주전으로 뛴 이상혁은 아직도 게임이 “재밌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상혁은 파트오너 계약으로 T1의 선수이자 공동 구단주다. 선수로서의 계약은 일단 오는 2022년까지다. 멀기만 했던 은퇴에 대해서도 그는 고민하고 있을까. 돌아온 대답에서도 ‘재미’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게임의 본질이기도 한 재미는 이상혁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은 에너지였다. “저 스스로 (선수 생활이) 더 이상 이로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은퇴하겠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서는 재미가 없어지면, 이런 경험들이 저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면 그때 은퇴를 고려할 것 같습니다. 게임에 대한 흥미와 재미가 가장 큰 가치입니다”.

마지막으로 제2의 페이커를 꿈꾸는 ‘페이커 키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인터뷰 내내 단답형만 고집하던 그에게서 가장 긴 대답이 나왔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가 되려면 그랜드마스터(상위 0.027%)만 찍으면 된다”며 “최소한 그랜드마스터는 달성하고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다른 분야는 시험도 봐야 하고 운도 따라야 하고,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게임처럼 객관적으로 성적표가 나오지 않는 데 비해 리그 오브 레전드는 가이드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게 이유다.

약관을 살짝 넘어선 나이에 세계를 제패한 프로게이머 이상혁. 그가 희생한 것들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 그가 인터뷰 말미에 진심을 담아 전한 말.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먼저 심사숙고해보세요. 지금 자신이 놓칠 수 있는 것이나 앞으로 놓칠 것들을 잘 계산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96년 서울 △2013년 T1(옛 SK텔레콤 T1) 입단 △2013·2015·2016 LoL 월드 챔피언십 우승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e스포츠(시범종목) 은메달 △2020년 T1 파트오너 계약

오지현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