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산업안전보건법보다 사업주와 법인의 처벌 수위를 높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정치권이 강하게 추진하겠다고 나서자 재계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 산안법이 세계 최고 수준의 사업주 처벌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가운데 추가적인 법 제정이 이뤄질 경우 ‘이중규제’라는 논란과 함께 ‘과잉입법’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사업주와 원청이 책임과 관리범위를 넘어 안전보건규정을 모두 준수할 수 없는 현실을 정치권이 고려하지 않은 채 지나치게 사고의 책임을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에게 묻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내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내후년 대선을 앞두고 노동계 표심 잡기에 나선 정치권이 기업과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해 경영위축을 재촉하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 나오는 실정이다.
◇정의당에 국민의힘 연대…민주당도 가세=11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법안 발의를 예고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사망사고와 같은 중대재해가 발생할 경우 기업과 경영책임자를 강하게 처벌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다. 과거 고(故) 노회찬 의원이 지난 2017년 관련 법안(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발의했으나 입법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21대 국회가 개원된 후 택배근로자의 과로사가 잇따르면서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처벌 강화에 보수야당인 국민의힘까지 가세하며 입법에 속도가 붙는 모습이다. 아직 윤곽을 드러내지 않은 국민의힘과 달리 박 의원안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안은 산업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등 중대재해가 발생할 때 법인과 사업주·경영책임자는 물론 공무원까지 형사 처벌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지운다는 점에서 큰 틀이 같다. 아울러 정의당안은 경영자 형사처벌을 3년 이상 유기징역 등으로 강화했고 손해액의 최대 10배인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했다. 이에 박 의원안은 사망 시 2년 이상 징역 또는 5억원의 벌금, 법인의 경우 2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또 정의당안과 달리 징벌적 벌금 수위를 낮추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영세사업장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법 적용을 4년간 유예했다.
◇이중규제·과잉입법 논란=문제는 산안법 전면개정안이 시행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법을 바꿔 시행한 지 반년 만에 또다시 처벌 수위를 높이는 법안을 제정하고 나선 것 자체가 지나친 ‘처벌 만능주의’라는 지적이다. 현재도 사업장 사고 시 징역 1년 이하로 처벌을 제한하는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 한국의 산안법은 강력한 법으로 통한다. 경기도에 있는 한 제조업체 대표는 “법이 없어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처벌에 또 처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옥죄려고만 하지 말고 현행법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사전예방책에 정치권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사업주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한 산안법 개정 이후 지난 6개월 동안 사망자 수는 전년 동기 대비 5명, 사고 재해자 수는 4만4,331명으로 1,486명(3.5%) 증가해 산재 예방 효과조차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처벌형량이 높다고 사고를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재계 관계자는 “국제적으로 비교 가능한 사고 사망만인율만 해도 선진국보다 2~3배 높은 실정”이라며 “처벌을 ‘이중·중복·과잉’으로 하기보다 예방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례없는 강한 처벌=우리나라의 산안법은 이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강한 처벌을 담고 있다. 산안법은 사망사고 시 사업주에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반면 해외의 경우 사업주가 안전보건조치를 위반할 경우 일본은 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 50만엔(약 550만원), 미국은 6개월 미만의 징역 또는 1만달러(약 1,200만원) 이하의 벌금, 독일은 1년 이하의 징역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민주당과 정의당이 추진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규정이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것으로 평가받는 산업안전보건법을 뛰어넘는 초고강도 법안이라는 점이다.
◇시스템 구축, 문화 개선 필요=일각에서는 시스템 구축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원청과 하청 간에도 안전관리 역할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적정한 책임을 부여하는 식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원청에는 하청의 안전보건활동을 지도·지원하는 업무를 중심으로 하청과 협력하도록 하고 정보 제공과 관리·감독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며 “불법파견 논란이 없도록 원청이 하청 근로자에게 직접 안전상 지시·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 마련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산재 예방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처벌 위주에서 탈피해 인센티브 제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안전관리를 주도적으로 해나갈 경우 해당 기업에 재정과 기술 지원, 감독 면제 등의 혜택을 부여해 기업 저변에 산재 예방 시스템과 문화가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안전 전문가는 “기업들은 이미 선제적으로 강화된 안전대책을 시행하고 사업장 내 환경안전에 역량을 쏟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기업규제 3법, 다중대표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이 논의 중인 상황에서 또 다른 기업규제 법안을 논의하는 상황이 참담하다”고 말했다.
/송종호·양종곤·한재영기자 joist1894@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