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현장을 뛴 경제사상가의 삶...이념 갈등에 경종 울리다[책꽂이]

■앨버트 허시먼

제러미 애덜먼 지음, 부키 펴냄

독일 출신 유대인 학자 허시먼

좌우 이념 아닌 현지인과 연대

제3세계 경제발전 방법론 모색

수학적 분석 대신 인문학 바탕

복잡한 경제이론 쉽게 설명도

앨버트 허시먼이 1982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기념 강연을 하는 모습. 1970년대 이후 그는 학문 간 경계를 아우르는 경제사상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사진제공=부키앨버트 허시먼이 1982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기념 강연을 하는 모습. 1970년대 이후 그는 학문 간 경계를 아우르는 경제사상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사진제공=부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유의 ‘개혁’을 놓지 않은 경제사상가. 독일 출신의 유대인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시먼(1915~2012)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평가다. 허시먼은 사상적 뿌리를 마르크스주의에 둔 진보적 이론을 펴면서도 사회주의가 제시한 유토피아를 의심했고, 시장을 신뢰했지만 시장만능주의는 경계했다. 그는 또한 현장에서 부딪히며 제3세계 경제개발의 방법론을 모색한 ‘숙고하는 활동가’이기도 했다. 책 ‘앨버트 허시먼’은 독창적인 개발경제학자이자 개혁적인 사상가였던 그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한 평전이다.

저자인 제러미 애덜먼 프린스턴대 역사학 교수는 미국에서 2013년에 출간한 이 책이 특히 주목한 것은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경제학자로서의 허시먼이다. 경제사상가로서 허시먼은 유럽, 미국, 남미를 넘나들며 경제학뿐 아니라 정치·철학까지 아우르는 통찰을 제시했다. 그는 경제학하면 떠올리게 되는 수학적 모델을 쓰기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복잡한 개념에 알기 쉽게 접근하는데 탁월했다. 그의 대표적 이론인 ‘터널효과’는 정부가 적절한 분배에 나서지 않을 경우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한 위법 행위와 사회 혼란이 만연하면서 성장 동력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점을 편도 2차로 터널 안의 차량 흐름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

저자는 허시먼의 사상적 핵심을 ‘가능주의’로 요약한다. 허시먼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황에 실망하고 회의에 빠지면서도 다시 희망과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애덜먼은 “허시먼은 불만족과 후회라는 요인을 포함하지 않는 이론을 추구하다가는 희망 또한 제거해 버리게 될 것이라 여겼다”며 “유토피아주의적 사고에도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는 극단주의를 평생 미심쩍어했다”고 전한다. 허시먼은 사회주의 혁명도, 천민자본주의적 반동도 아닌 ‘개혁’의 길이 실현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을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견지했다. 이러한 그의 지론은 후대의 연구자들이 회의주의에 빠져 낙담하지 않도록 용기를 줬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허시먼(왼쪽)이 콜롬비아 야노스 평원에서 아내 새러 등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부키허시먼(왼쪽)이 콜롬비아 야노스 평원에서 아내 새러 등 일행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부키


하지만 애덜먼은 허시먼이 사상가로서만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 듯 제3 세계 현장에서 경제개발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면모를 적극 부각한다. 그 시작은 1950년대 콜롬비아에서 세계은행(WB) 경제자문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남미 등 제3세계는 서방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의 첨예한 경쟁의 장이었다. 허시먼은 공산주의 확신에 회의적이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대규모 개발 계획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서방의 비전에도 동조하지 않았다. 특히 WB 전문가들이 현지인을 변화의 대상으로만 보는데 반발한 허시먼은 경제 개발이 외부에서 도입하거나 부과하는 과제가 아니라, 현지인들과 연합하고 그들의 기민한 전술을 활용하여 이뤄내야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계획에 얽매이기보다 현장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실험과 임시변통’에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저서 ‘경제발전 전략’, ‘진보를 향한 여정’, ‘개발 프로젝트 현장’ 등 이른바 개발경제학 3부작은 이러한 그의 생각에 바탕을 뒀다.


저자에 따르면 허시먼의 이러한 현장 참여적 성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험이 토대가 됐다. 허시먼은 사회민주당 청년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 나치 집권 후 독일을 탈출했다. 파리와 런던에서 대학을 다니고 이탈리아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이탈리아 반파시즘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엔 프랑스에서 한나 아렌트, 마르크 샤갈, 마르셀 뒤샹 등 유대인 예술가·지식인 2,000여 명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자신은 미국으로 피신 후 미군으로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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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허시먼(가운데)가 세계은행(WB)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인도의 개발 현장을 방문해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부키앨버트 허시먼(가운데)가 세계은행(WB)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인도의 개발 현장을 방문해 현지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부키


허시먼은 말년에 하버드대 등 유수의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학자로서의 명예를 누렸지만 노벨경제학상은 받지 못했다. 이는 허시먼이 실천적 관심에서 촉발된 사유의 실마리를 좇아 거대 이론의 맹점을 파고 들었지만, 자신만의 학파를 형성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분석했다. 또 학계의 흐름이 갈수록 수학적 분석으로 경도된 반면 허시먼은 학문 간 경계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허시먼이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영향력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1991년에 펴낸 마지막 저서 ‘반동의 화법’(한국 제목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 미국 보수세력의 생각과 논리구조를 읽는 자료로 재평가받으면서 대중은 그를 다시 사상의 자유시장에 소환했다. 1988년 미국 대선에서 맹목적 우파인 네오콘이 적대적 비난으로 공공 담론의 격을 떨어뜨리는데 분노하여 집필한 이 책에서 허시먼은 변화에 저항하려는 보수세력이 △기존 질서를 흔드는 시도가 외려 정반대의 결과로 역효과를 낳을 것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을 것 △변화하면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험해질 것 등의 논리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고 있는지 지적했다. 허시먼의 말과 글은 극단적 정치이념이 대립하는 오늘날에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있다. 5만5,000원.




박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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