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칫덩어리가 효자로’ ‘미운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부활’
최근 해양플랜트 앞에 붙는 수식어입니다. 2년 만에 들려오는 수주 소식에 들뜬 분위기입니다. 막상 조선소 분위기는 딴판입니다. “그간 지연·중단됐던 해양개발 프로젝트 물량이 이제야 나오는 수준이다”며 “들뜨기는 이르다”고 잘라 말합니다. 최악의 시기가 지났을 뿐, 2010년대 초반 해양플랜트 물량이 쏟아졌던 시기와는 다르다고 선을 그은 겁니다.
“시추설비 발주 나와야 진짜 호황…현재는 생산설비 발주 뿐”
해양플랜트(Offshore Plant)는 문자 그대로 바다의 공장이라는 뜻입니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을 시추, 생산, 저장, 하역 등 작업을 하는 일련의 구조물을 총칭합니다. 1970년대 초, 육지 자원이 떨어져가자 대안으로 부상한 게 해양플랜트입니다. 해양플랜트는 크게 시추와 생산 두 가지 역할로 나뉩니다. 해상에 석유, 천연가스가 있나 찾는 게 시추 설비고 생산 설비는 앞서 찾은 자원을 뽑아내는 일을 합니다. 시추(試錐)는 탐사·지질 조사 등을 위해 땅에 깊이 구멍을 뚫는 일을 뜻합니다. 영어로는 ‘보링(boring)’입니다.
조선업계에서는 해양개발의 호황은 시추 설비 발주 여부로 파악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시추는 향후 석유, 천연가스 수요가 크다고 판단돼야 진행되는 사전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시추선 발주가 몰렸던 건 2008년 이후입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유가가 배럴 당 130달러를 오르내리며 시추 작업의 채산성이 높아졌던 겁니다. 시추선은 세밀한 설계에 건조 기술력이 투입돼야 합니다. 가격은 최소 5억(약 5,000억 원) 달러에서 최대 30억 달러(약 3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오일 메이저들은 앞다퉈 바다에서 석유를 캐내겠다고 뛰어들었습니다. 발주도 쏟아졌습니다. 오일 메이저들은 시추선을 필두로 드릴십(Drill ship), 부유식생산저장하역설비(FPSO·Floating Production Storage and Offloading), 반잠수식원유생산설비(FPS·Semi Floating Production System)과 같은 해양플랜트를 경쟁적으로 발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소 사람들은 당시와 현재 분위기는 딴판이라고 설명합니다. 조선·해양업계 관계자는 “요즘 발주되는 생산설비는 이미 시추가 끝난 현장에서 계획대로 자원을 뽑아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며 “계획된 일정에 맞춰 발주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석유, 천연가스 수요가 창창하다면 시추설비를 발주해 신규 유전을 찾아다니겠지만 지금은 이미 발견한 유전을 활용하는 수준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해양플랜트, 한때는 ‘백조’ 현재는 ‘미운오리 새끼’로 전락
2000년대 후반, 2010년대 초반은 지독한 해운 불황이었습니다. 조선소 주력 품목인 벌크선, 컨테이너선, 유조선 등 상선 발주가 뚝 끊겼습니다. 대안이 필요했던 조선사 눈에 띈 게 해양플랜트입니다. 해양플랜트는 수주 금액이 선박의 수 배에 달합니다. 1기만 수주해도 실적 개선 폭이 큽니다. 당시 우리 조선소 입장에서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문제는 저가 수주였습니다. 한국 조선 3사 간 수주 경쟁이 붙었고 4~5조 원을 받아야 할 해양플랜트를 3조 원에 해주겠다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공격적인 저가 수주 경쟁에 한때 한국 조선 3사의 전 세계 해양플랜트 시장 수주 점유율은 70%까지 치솟았습니다.
해양플랜트 채산성이 보장되는 기준 유가는 배럴 당 50~60달러로 알려졌습니다. 2015년까지만 해도 80~100달러를 오르내리던 유가는 2016년 20달러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셰일가스(Shale Gas) 시추가 본격화되면서입니다. 셰일가스는 지하 깊은 암석층에 매장된 석유로 이전까지는 기술력이 부족해 개발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진보하면서 2010년에는 미국 전체 석유생산량 중 24%를 차지할 만큼 커졌습니다. 유가가 배럴 당 120달러를 웃도는 상황에서 채산성이 좋은 셰일가스 생산량도 함께 늘었고 원유는 공급 과잉으로 치달았습니다. 심해에서 원유를 캐는 건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 돼 버립니다. 이 즈음 거액의 선금을 지불한 발주처가 발주를 취소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또 우리 조선사로서는 낯선 해양플랜트 부문이다 보니 잦은 설계 변경, 공사 기간 연장 등 추가 비용이 들기도 했습니다. 꿈에 부풀어 수주했던 해양플랜트가 악몽으로 전락한 셈입니다. 조선 3사의 조 원 단위 손실도 이때 났습니다.
2년 만에 수주 나온 해양플랜트…“최악은 지났다”
아직 흥분할 때는 아니지만 2년 만에 나온 수주가 반가운 건 사실입니다. 대우조선해양(042660)은 이탈리아 엔지니어링 업체인 사이펨과 협업해 브라질 페트로브라스로부터 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FPSO)를 수주했다고 지난 14일 밝혔습니다. 총 계약 규모는 2조 6,000억 원으로 대우조선해양의 계약 금액은 1조 948억 원입니다. 2019년 반잠수식 원유생산설비 선체를 2,000억 원에 수주한 뒤 2년 만에 들려온 해양플랜트 수주 소식입니다. 한국조선해양(009540)은 올 들어 해양플랜트 2건을 수주했습니다. 미얀마 쉐 가스승압플랫폼을 5,000억 원에, 브라질 부지오스 FPSO를 8,500억 원에 각각 수주했습니다.
국내 조선업계는 발주가 예정된 해양플랜트 수주에 팔을 걷어 붙였습니다. 앞서 대우조선해양이 수주를 따낸 페트로브라스는 FPSO 1기를 추가 발주했는데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이 입찰 자격을 얻고 수주전을 벌이는 중입니다. 현재 페트로브라스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심해 유전인 브라질 부지오스 필드에서 4기의 FPSO를 운영 중입니다. 추정 매장량은 30억 배럴입니다. 2030년까지 8기를 추가 투입해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할 계획이다. 삼성중공업(010140)은 나이지리아 봉가 사우스 웨스트 아파로(BSWA)의 FPSO 프로젝트 수주를 노립니다.
2년 만에 수주 시작 해양플랜트…“최악은 지나, 큰 기대는 아직”
올 초만 해도 조선업계는 해양 부문에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 여파에 저유가 상황이 지속된다고 전망해서입니다. 한국조선해양은 작년 7월엔 별도로 운영하던 조선사업부와 해양사업부를 통합해 조선해양사업부로의 조직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도 해양부문 인력을 감축했습니다.
조선업계는 해양플랜트 사업이 최악의 시기를 벗어난 데 안도합니다. 다만 큰 기대를 걸기는 이르다는 게 중론입니다.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해양개발이 본격화하는 신호탄은 시추설비 수주인데 현재는 기존에 시추된 현장에서 원유를 생산하는 설비 뿐이다”며 “중단·지연됐던 해양개발 프로젝트가 재개하며 미뤄졌던 발주가 진행되는 정도로 보는 게 맞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종갑 기자 gap@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