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행정부가 사실상 자국 빅테크 기업만 겨냥해 규제를 추진하는 유럽연합(EU)에 역차별하지 말라는 취지의 서한을 보냈다. EU가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토종 테크 기업을 육성하겠다고 예고하자 미국이 이례적으로 빅테크 감싸기에 나선 모습이다.
8일(현지 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나 러몬도(사진) 미 상무장관의 수석정책고문인 아룬 벤카타라만은 안드레아스 슈바프 유럽의회 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EU에서 추진하는 디지털시장법의 대상에는 미국 기업뿐 아니라 유럽 등 해외 기업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2월에도 러몬도 장관은 “(디지털시장법이) 미국 기술 회사에 불균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바 있다. 사실상 미 행정부가 EU에 미국 기업만 역차별하지 말 것을 재차 요구한 셈이다.
올 들어 EU는 빅테크 규제를 골자로 한 디지털시장법과 디지털서비스법 제정 논의를 본격화했다. 디지털시장법은 빅테크 기업이 플랫폼에 자사 서비스를 다른 서비스보다 우선 노출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디지털서비스법은 빅테크의 이용자 데이터 수집 문턱을 높여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까다롭게 한다. 두 법안 모두 빅테크 기업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를 막기 위한 것이다.
미국은 두 법안이 결과적으로 미국 빅테크만 겨냥한 조치가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두 법의 적용 대상을 시가총액 650억 유로(약 89조 원) 이상인 테크 기업으로 규정할 예정이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MS)·알파벳·아마존·페이스북 등 미국 5대 기업은 가뿐히 이 기준을 넘는다.
하지만 EU의 기술 기업 가운데는 지난 2019년 기준 시가총액 1위인 독일 소프트웨어사 SAP만 포함된다. EU가 두 법안을 소개하며 언급한 곳 역시 아마존과 구글·페이스북 등 미국 기업뿐이다.
미국 정부로서는 자국에서 빅테크 규제를 강화하더라도 해외에서 미국 빅테크가 불이익을 받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 상원 법사위원회는 지난달 디지털시장법과 유사한 ‘미국혁신및선택온라인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이 "해외 정보기술(IT)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수조억 유로 규모의 EU 공공펀드를 조성하는 움직임 속에 사실상 미국 빅테크를 겨냥한 조치를 구체화하자 경고를 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