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동십자각] 대통령의 자격

이지성 사회부 차장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야당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대통령이었다. 협치와 포용의 정치를 공언했으나 특유의 직설 화법과 독단적 국정 수행이 그를 미완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제주 해군기지 건설,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는 야당도 전적으로 성과를 인정한다.

보수 진영이 지금도 이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명분이 아닌 국익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여당 중진과 친노 세력이 합세해 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처사라며 거세게 반발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를 강행해 관철시켰다. 자신의 공약을 파기하고 당론과 배치되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는 국가를 최우선에 두고 이념 대신 실리를 선택했다.



러시아의 일방적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포퓰리즘을 앞세운 국가 수반이 이념과 명분에 사로잡히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난 2019년 73%의 압도적 투표율로 당선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위시한 친서방 정책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핵무기를 폐기하면 서방에 편입될 것이라는 국민들의 기대와 이에 대한 러시아의 견제가 역설적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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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친러 반군이 있는 돈바스 지역에서 국지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러시아는 전면전을 감행했다. 우방인 줄 알았던 서방 국가는 공허한 규탄 성명만 내놓을 뿐 철저히 우크라이나를 외면하고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미국도 경제 제재만 외치며 발을 빼는 모양새다. 소련 독립 이후 30년 만에 세계 4위에서 22위로 군사력이 추락한 우크라이나는 이제 서방의 지원이 없는 한 러시아의 속국이 될 처지다. 국제사회가 어떠한 비난과 제재를 가하더라도 국익을 챙기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은 엄혹한 국제 질서의 현실을 드러낸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5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도 명분과 이념이다.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36차례의 남북 공식 회담을 개최하며 북한에 매달렸지만 북핵 문제가 해결됐다거나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됐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실기한 명분 쌓기는 일본의 경제 보복과 중국발 요소수 사태를 겪으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만 고스란히 그 피해를 떠안았다.

10일 뒤 우리는 새 대통령을 뽑는다.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이라는 오명 속에 차악을 골라야 한다는 자조적인 한탄이 벌써부터 나온다. 세계 6위 군사 강국이라는 한국이 30년 뒤 우크라이나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국익에 부합하면 기꺼이 공약을 파기하고 당파를 초월할 수 있는 대통령을 우리는 만나볼 수 있을까.


이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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