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정치·사회

美 vs 中·러 파고드는 제3지대…'양극→일극→다극화' 지각변동

[국제질서 룰이 바뀌었다]

<상>절대 강자 없는 신냉전의 시대

우크라戰 놓고 G7·브릭스 분열…지역패권 구축 가속

오커스·쿼드·RCEP…글로벌 '안보경제동맹'으로 결집

"韓·臺 지정학 요충지, 패권경쟁 전쟁터 가능성" 우려도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회의장에서 러시아 재무장관의 발언이 시작되자 회의에 직접 참석한 18개국 중 12개국 재무장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항의 표시로 벌인 이 같은 단체 행동은 사실상 미국의 주도하에 이뤄진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도·인도네시아·스위스·브라질·나이지리아 등 6개국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회의 의장국이던 스페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러시아 제재에 미온적인 국가들이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국제기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 7개국(G7)과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갈등이 미국 심장부에서 고스란히 노출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냉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구축됐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 됐다. 수년 전부터 부각돼온 중국과 러시아의 패권주의가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지고, 미국이 이끄는 서방과 그에 맞서는 ‘드래건베어(Dragonbear,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관계)’의 신냉전 틈바구니에서 인도·브라질·사우디아라비아 등 신흥 강대국들은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역 패권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재무장관들의 퇴장 사태가 벌어진 IMF 회의는 그 분열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었다. 글로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가 쇠퇴하면서 예측하기 어려운 다극화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VS 중러 VS 신흥 패권국…분열하는 세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운영하는 세계적인 리서치 기관 인텔리전스유닛(EIU)은 3월 보고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세계 지정학적 질서가 바뀌는 ‘결정적 순간(defining moment)’으로 명시했다. ‘세계 경찰’로서 자유주의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해온 미국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으로 “세계가 훨씬 더 불안정하고 위험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이 구축한 국제질서가 약화되면서 향후 수십 년간 적대적인 진영들 간의 패권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이번 사태로 미국은 유럽,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끈끈한 동맹은 복원했으나 그 이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맞서는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을 일찌감치 나토에 돌렸고 브라질·사우디아라비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 강대국들은 각자의 국익을 모색하며 미국의 대러 제재를 사실상 관망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함께 쿼드(QUAD, 미국·호주·인도·일본 안보협의체)를 구성하는 인도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대신 러시아산 원유를 대거 사들이며 러시아와의 경제적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마틴 바인더 영국 레딩대 교수는 “세계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브릭스 국가들 사이에서 미국과 서방이 지배해온 글로벌 질서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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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무실 국제기구…정글 속 ‘안보 동맹’ 찾기

세계가 공동의 발전을 위한 대화와 타협 대신 복잡한 지정학적 이해관계 속에서 각자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파편화된 블록 간의 패권 다툼 양상을 보이면서 과거 국제질서를 지탱하는 주축 역할을 해온 국제기구들도 유명무실해졌다. 전쟁이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최대의 다자 외교 무대인 유엔은 ‘분쟁 조정’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선진국과 신흥국이 모여 국제 경제 질서를 협의하는 유일한 창구인 주요 20개국(G20)도 분열 위기에 직면했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블록화된 경제안보 동맹들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안보동맹인 ‘오커스(AUKUS)’와 쿼드, 경제안보 동맹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중국이 주도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의 출현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국제 외교 질서가 파편화됨에 따라 추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사태가 재발할 경우 세계경제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다자 외교가 무너지면서 자신을 보호할 확실한 안보 동맹을 찾아 나선 각국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유럽의 대표적 중립국을 표방하던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전 덴마크 총리는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글에서 “러시아 탱크가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는 광경은 유럽의 안보에 대한 오랜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동맹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대만 등 지정학적 요충지…긴장감 고조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국제질서 재편은 한국과 대만처럼 지정학적 요충지에 놓인 국가들에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나토의 동진(東進)과 러시아의 ‘구소련 부활’이 우크라이나에서 격돌한 것처럼 한국이나 대만이 강대국 패권 경쟁의 전쟁터가 되는 제2, 제3의 우크라이나 사태가 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를 제재하면서도 전쟁 참여는 끝내 피하는 미국, 핵무기를 포기한 우크라이나의 운명 등이 한반도와 인접한 중국이나 북한에 다양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할 브랜즈 미국기업연구소(AEI) 선임연구원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미국과 다른 서방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훈련·자금을 제공하면서도 전투 참여를 안 했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시 주석을 더 위험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윤홍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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