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한반도24시]김여정의 분노와 비명

■이춘근 국제정치 아카데미 대표

尹대통령 '담대한 구상' 제안에

김정은 여동생 담화문 통해 거부

여고생이 쓴 듯 내용 조잡하지만

'경제 향상=정권 붕괴' 사실 알아

北권력 핵심계층 딜레마 잘 표현






윤석열 대통령이 해방 77주년, 건국 43주년 기념식에서 행한 연설에서 소위 ‘담대한 구상’이라는 대북 제안을 발표했다. 담대한 구상의 내용은 북한이 진정으로 핵 개발을 포기한다는 조건하에 북한에 대한 대폭적 경제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기왕의 대북 정책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것이었다. 이는 북한의 핵 개발을 경제적 유인으로 해결해 보려는 것으로 이제까지는 그 효용성이 ‘전혀’ 없는 정책이었다. 북한의 핵 개발 문제가 국제 문제로 비화한 것이 1989년 무렵부터이니 이미 30년도 더 지난 문제이며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 혹은 사용해 보지 않은 ‘평화적인 방법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방법들은 실패했다. 이번 윤 대통령의 제안도 발표한 지 3일 만에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김정은의 친여동생 김여정의 담화를 통해 공식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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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의 담화문은 그 제목이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로 돼 있으며 역사에 남을 외교문서(diplomatic document)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과 내용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김여정의 담화는 항상 그랬지만 이번에도 마치 말투와 내용이 분노에 찬 고등학교 여학생이 쓴 것 같았다. 김여정의 담화 중에는 “윤석열의 ‘담대한 구상’이라는 것은 검푸른 대양을 말리워 뽕밭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만큼이나 실현과 동떨어진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세상에는 흥정할 것이 따로 있는 법, 우리의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짝과 바꿔 보겠다는 발상이 윤석열의 푸르청청한 꿈이고, 희망이고, 구상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천진스럽고 아직은 어리기는 어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라는 말이 나온다. 김여정의 담화는 이처럼 내용보다는 불필요한 형용사가 더 많이 들어가 있고 현재의 딜레마를 해결할 아무런 방법을 가지지 못한 북한 정권 담당자의 장탄식(長歎息)이다. 김여정은 핵무기를 국체라고 말했는데 국체(國體)란 나라의 체면 또는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구별한 국가의 형태(예로서 민주국과 군주국)를 표시하는 정치학의 용어인데 김여정이 사용한 국체라는 용어는 ‘나라의 체면’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김여정의 담화는 그 내용이 졸렬하기는 하지만 현재 북한 정권이 당면한 딜레마를 잘 표현하고 있다. 국제체제의 무정부적 속성은 지구상 어떤 국가라도 생존을 국가 제일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생존이란 ‘국가의 생존’과 ‘정권의 생존’을 동시에 의미하며 국가 안보에 성공한 정권은 정권의 안보도 확보하기 마련이다. 북한이라는 국가가 생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과 국가 경제를 향상시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 북한은 체제를 개방하면 된다. 즉 문을 활짝 열면 북한이라는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 경우 김정은 정권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김여정의 8월 18일 담화는 북한이 문을 열면 김정은 정권은 죽는다고 비명을 지른 것이다. 국가가 사는 방법과 정권이 사는 방법은 같은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80년이 다 돼가는 북한의 봉건적 세습 독재 체제는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 하지만 그 경우 정권은 붕괴될 수밖에 없는 비정상 국가를 만들고 말았다.

김여정과 북한 정권의 핵심 계층은 윤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북한 주민과 북한을 살리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북한 주민이 자유롭고 풍요하게 살게 되는 정책을 택할 경우 자신들의 권력은 파멸의 길로 직행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정치가들은 ‘사적 이익을 위해 정치를 시작한다’는 유명한 공식이 있다. 북한의 경우 사적인 이익인 김정은 정권의 유지를 위한 방법과 공적인 이익, 즉 북한 주민의 생활 향상을 위한 방법은 180도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오빠와 내가 살자니 국민들이 죽겠고 국민을 살게 하자니 오빠와 내가 죽겠구나”라는 푸념을 언제 그만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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