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대학입시 수시모집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당정이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해 의료개혁 문제를 논의하자고 나서면서 의료계 안팎의 셈법이 분주해졌다. 특히 대통령실이 2026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에 대해 '원점 논의가 가능하다'며 종전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의정갈등에 돌파구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6일 의료계에 따르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이날 현안 브리핑에서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를 포함한 의료개혁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을 두고 내부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추석 연휴를 열흘 앞두고 응급실 등 의료현장의 파행이 이어지고 있어 의료계 차원에서도 정부와의 논의가 절실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도 줄곧 정부와의 대화를 요구해 왔다. 다만 협의체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논의가 이뤄질지 알려진 바가 없는데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심해 선뜻 참여 여부를 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강희경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이날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협의체 등 어떤 형식으로라도 (의료계가 정부와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협의체가 성사되려면 정부가 진정성 있는 제스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현장 의사들의 의견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의료계가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강 위원장은 "정부나 의료계나 최종적인 지향점은 같지 않나. 정부는 의료계가 합리적인 안을 내지 않아 논의가 안 된다고 하지만 합리적 안은 정부가 내놔야 한다"며 "앞서 정부가 낸호은 제안들은 의료계 입장에서 전공의들이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법적, 행정적 족쇄라고 여겨질 뿐이다. 7개월째 이어지는 의정갈등을 끝내려면 정부가 전공의들이 다시 돌아올 명분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의개특위(대통령직속 의료개혁 특별위원회) 같이 의료계가 빠진 허울 뿐인 협의체가 하나 더 만들어지면 무슨 소용인가"라며 "의대 증원 규모를 논의하는 건 다음 문제다. 진정한 의료개혁을 원한다면 의사들이 필수의료에 뛰어들고 싶어지는 환경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했다.
비대위는 이날 오전 입장문을 내고 "미래에 필요한 의사 수를 예측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를 만들어 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비대위는 각계 연구자들을 통해 자체적으로 취합한 근거자료들을 홈페이지에 공개한 상태다. 이들은 "의사 수요는 같은 자료를 이용해도 사용하는 변수나 시나리오마다 분석 결과가 달라진다"며 "어떤 자료, 변수, 시나리오를 사용하는 게 합당한지를 정부가 의료계와 국민에게 제안하고 함께 고민해 합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의료계가 줄기차게 요구해 온 대로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자체를 백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더욱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의대 정원이 증원된 채 당장 9일부터 수시 모집이 시행되면 의료현장의 위기를 되돌리기 불가능해지는 만큼, 파국을 막을 마지막 기회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을 밀어붙이겠다던 대통령실이 합의할 여지를 내비친 것도 내년 의대 증원 백지화 요구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의료계는 현재 의료대란을 수습하고 비정상적인 의대 교육을 막기 위해 내년 의대 증원을 유예하자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며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유예하는 것만이 현재 의료대란을 수습할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대학 행정이나 일반적인 대학입시 일정을 고려한다면 내년도 의대 정원 조정은 불가능하다"면서도 "정치는 상식과 불가능을 뛰어넘어 판을 뒤집을 수가 있지 않나. 정치적으로는 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앞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과 만났던 것처럼 국회가 답보상태인 의정갈등을 풀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견해다. 이 교수는 "애시당초 정부가 의대 정원 규모를 500~700명 정도로 제시하고 디테일하게 정책을 추진했어야 한다"며 "무리하게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애먼 국민들을 희생시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정부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려면 응급실 일일브리핑 방식도 바꿔야 한다.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게 목적이라면 복지부 2차관이 아니라 응급의료법상 응급실 최고 컨트롤러 타워인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직접 브리핑을 담당하는 게 적절하다"며 "119구급상황센터장이 배석한다면 국민들에게 더욱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의정갈등의 핵심인 전공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변수로 지목된다. 익명을 요구한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의들을 돌아오게 하려면 2026학년도가 아니라 2025학년도 의대 증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며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의료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