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토요 산책] 하얼빈역의 안중근기념관

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지난 19일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역 구내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개관됐다. 하얼빈역 플랫폼은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민족의 이름으로 처형한 역사의 현장이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5주년, 순국 104주년이 된다.

침략원흉 처단현장에 순국정신 어려


홍범도·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가 항일독립전쟁 최대의 승첩이라면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안 의사는 1909년 이전부터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경과 싸우다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민족의 원수, 동양평화의 적 이토를 처단하고자 결심했다.

안 의사는 그해 10월21일 동지 우덕순·유동하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 하얼빈에 도착해 그날을 기다렸다. 10월26일 오전9시30분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와 멎고 이토가 열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러시아 대신 고고프체프와 의장대를 사열한 뒤 각국 영사들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권총을 뽑아들고 뛰쳐나간 안 의사는 이토에게 총탄 네 발을 연사했다. 첫발은 이토의 앞가슴에, 제2탄은 옆가슴에, 제3탄은 배를 관통했다. 의거가 성공하자 안중근 의사는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하얼빈역에서 300m쯤 떨어진 만주 둥칭(東淸)철도국 사무실로 끌려간 안 의사는 "나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을 총살, 응징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러시아군에서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진 안 의사는 그 뒤 200여일 동안 뤼순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가 이듬해 3월26일 귀중한 목숨을 바쳤으니 그해에 꽃다운 나이 3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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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탄할 사실은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넘었건만 아직까지 무덤과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 의사의 무덤과 유해를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본이 매장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으며 관련 자료도 모두 소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하얼빈 영사가 '안중근의 유해를 절대로 가족에게 인도하지 말라'고 관둥도독부에 보낸 전문이 최근 발굴되기도 했다.

일본정부는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에 대해 또 망언을 늘어놓고 있다. '안중근은 초대 일본총리를 살해한 테러리스트'라느니, '안중근은 범죄자'라느니 하고 떠든다. 일본총리는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고 일본군위안부와 난징대학살은 없었다는 등 허튼소리를 쏟아낸다.

안 의사 기개 국난극복 귀감 삼아야

이토가 정의로운 인물인데도 안중근 의사가 처벌했을까.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면서도 세계평화니 인권향상이니 떠들어대는 일본의 지도층과 극우인사들의 행태는 차마 눈뜨고 못 볼 노릇이다.

우리도 해마다 안 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만 되면 기념관을 새로 짓느니 세미나를 여느니 하는 것보다 동양평화를 염원하던 안 의사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제대로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다.

지금 우리는 또다시 정치·경제·외교·사적으로 난국을 맞았다. 국난극복의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안 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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