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CEO & STORY/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

[CEO & STORY/곽태선 베어링자산운용 한국법인 대표]

“저는 운이 참 좋습니다.”


변호사, 증권사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2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글로벌 금융사 베어링자산운용의 한국 법인을 맡고 있는 곽태선(55·사진) 대표는 모든 걸 운으로 돌렸다. 하지만 변화의 연속이었던 곽 대표의 인생을 그저 운으로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지난 1971년 12월25일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 순간부터 곽 대표의 인생은 운으로 치부할 수 없는 치열한 삶이 연속이었다.

미국 대학교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도 한국전쟁 발발로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곽 대표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이 자식들에게 되풀이되는 걸 막기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당시 일반 회사에서의 성공이 어려웠던 외국인 이민자 신분으로 주유소, 차량 정비소, 태권도장, 기념품 가게, 주류판매 등 소규모 사업을 주로 했던 곽 대표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길 원했다. 서울대를 나온 곽 대표의 아버지가 미국에서 열린 동창회에 가 보면 의대 출신이 가장 성공한 삶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곽 대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뉴욕 콜롬비아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과 안 맞는다고 판단한 그는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곽 대표에게 담당 교수는 “미국인들도 어려워하는 변호사를 영어가 익숙지 않은 외국인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며 “하루에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역사를 전공할 자신이 있으면 그 이후 변호사가 되라”고 조언했다. 곽 대표는 그 순간부터 책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주말에도 하루 4시간만 자며 공부에 집중했다. 잠옷을 입으면 잠이 들어 버릴까 두려워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공부만 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곽 대표의 영어 실력은 몰라보게 향상됐고 결국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다.

역사와 법, 언뜻 보면 현재 하고 있는 금융업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전공 같지만 자산시장에서 지금의 곽 대표를 만든 초석이 됐다.

곽 대표는 “올바른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팩트가 필요하다”며 “법학 수업 대부분도 팩트가 무엇이냐가 중심이었고 이러한 습관은 결국 투자자들의 자산을 운용할 때도 객관적 시각으로 다가서게 해줬다”고 말했다. 역사 전공 또한 도움을 줬다. 그는 “앞을 보기 위해서는 뒤를 많이 봐야 한다”며 “거대한 사이클로 진행되어온 금융시장도 크게 보려면 역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역사를 보면 항상 인류는 발전을 거듭해왔다”며 “이러한 생각을 통해 어떠한 일도 낙관적이고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팩트를 중시하고 역사의 큰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 덕분이었을까. 곽 대표는 한국 자본시장에 최초로 배당주펀드를 들여온 인물로 기록된다. 지난 2002년 처음 들여올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의 펀드였지만 지금은 국내 자본시장 최고의 상품으로 각광받고 있어 곽 대표의 탁월한 안목을 입증하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곽 대표는 발생한 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을 하는 일에 더 흥미를 느껴 기업전문 변호사를 선택했다. 미국에서 기업전문 변호사 생활을 하다 홍콩으로 영역을 넓힌 곽 대표는 홍콩에서 산업은행 차입문제나 한국 최초로 국내 기업의 중국 합작공장 설립 건 등을 다루면서 한국과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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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담당 변호사로 5년 이상 승승장구하던 곽 대표는 또 한 번 변환점을 맞는다. 곽 대표는 “기업담당 변호사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며 “영화로 치면 인생에 있어 주연은 아니더라도 조연 정도는 해야 하는데 기업 변호사는 중요한 일은 하지만 항상 뒷전에 머물러 있는 엑스트라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귀띔했다.

변호사 생활에 회의를 느낄 때쯤 영국 베어링증권으로부터 한국 지사에서 일해 달라는 러브콜을 받았다. 기업전문 변호사로서 경제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증권업무를 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 곽 대표는 베어링증권 도쿄지사에서 3개월간 연수를 받기도 했다. 대학시절 영어를 정복하기 위해 영어사전을 들고 책과 씨름했던 그는 이제는 어려운 증권용어와 특히 생소했던 한문을 배우기 위해 경제신문과 옥편을 펼치며 공부를 해 나갔다.

곽 대표는 “증권일을 시작할 때 처음 했던 일은 리서치였다”며 “당시 국내에 개념이 없었던 기업탐방을 처음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정확한 보고서를 내 해외 투자자들에게 한국의 기업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후 세이에셋코리아 창업 파트너로서 본격적으로 증권업무에 뛰어들었다. 이후 지난해 베어링자산운용이 세이에셋코리아를 인수하고 곽 대표를 한국법인을 총괄하는 대표이사로 임명하면서 다시 베어링과 인연을 맺었다.

변호사와 증권업무는 다르지 않느냐는 질문에 곽 대표는 “금융업무도 법처럼 팩트가 중요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예방하는 기업담당 변호사와 같은 성격의 일”이라며 “우리가 먼저 긴장하고 서두르면 실수를 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후 자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는 변호사와 같은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러한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대형 손실 없이 고객들의 자산을 지켜왔다”며 “유행 따라 상품을 쉽게 내놓지 않았고 철저한 리서치를 통해 한 발 앞선 상품들을 출시해 절대수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곽 대표는 앞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에서 많은 기회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아시아 시장이 지난 80~90년대에는 무조건 성장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질적인 성장을 우선시하고 있다”며 “중국도 시스템 개혁과 부패 척결에 나서고 있고 아베노믹스, 모디노믹스, 초이노믹스 등 아시아 시장 전체가 리폼 물결에 휩싸이고 있어 아시아 시장 자체의 가치가 한 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곽 대표는 국내 기업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이제 국내 투자자들은 단순히 애국심만으로 국내 기업의 주식을 사지 않는다”며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만 비교하는게 아니라 글로벌 기업과 함께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이익을 투자자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투자자들은 떠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국내 기업들도 단순히 물건만 잘 만들어 팔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가와 같은 기업가치의 매력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며 “글로벌화 된 시장에서 이제 주가도 글로벌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시대”라고 덧붙였다.

끝으로 곽 대표는 은퇴 이후 기업보다는 공익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통일 시대를 대비해 북한 재개발 사업 등에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곽 대표는 “금융업무의 처음을 베어링에서 시작했듯 마지막도 베어링에서 마치고 싶다”며 “이후에는 유엔이나 적십자,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공익 기구나 학계로 돌아가 통일 이후 북한의 재개발 사업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노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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