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피아니스트의 손과는 달랐다. 왼손 약지와 새끼손가락 손톱은 어둡게 변색됐고, 패이고 뒤틀린 자국이 선명했다. 7년 간 연주자를 괴롭혀 온 그 손가락은 그러나 고름을 빼내고, 손톱을 뽑아내는 와중에도 건반 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열린 2021 독일 본 베토벤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 우승’이라는 성과를 일궈냈다. 이 ‘아픈 손’의 주인은 피아니스트 서형민이다. 오는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리사이틀을 여는 그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마지막이니 마음대로 치고 가자”는 ‘내려놓음’이 우승의 열쇠였는지도 모르겠다. 올해 만 31세가 된 그에게는 마지막 콩쿠르였다. “손가락부터 시작해 여러 일을 겪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는 체념이 생기더군요. 마지막인데 ‘그냥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연주했는데 좋은 결과를 얻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결선에서 본인이 2017년 작곡한 3개의 피아노 소품을 연주해 호평을 이끌어냈다. 원래는 스승인 이영조 전 한예종 음악원장의 작품을 연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콩쿠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 자리에서 그가 치고 싶었던 것은 자작곡이었다. 콩쿠르에서 자작곡은 심사위원들이 그다지 선호하는 선곡은 아니다. 서형민은 “조심스레 곡 변경을 문의했는데, 괜찮다는 답변을 받아 내가 만든 곡으로 무대에 오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리사이틀 1부에서는 이 승리의 작품을, 2부에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0번’,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을 들려준다.
서형민은 4세에 피아노를, 5세에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가 직접 꾸린 현악 앙상블 ‘노이에’의 공연에 지휘자로 데뷔하며 활동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작곡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뿌듯함이 있고, 연주는 작곡가의 곡을 재료로 맛을 살려 손님(관객)에게 내놓는 보람이 있죠. 지휘자는 그 요리 과정을 조율하며 최상의 결과물을 책임지는 총주방장이 아닐까요.” 그는 오는 9월 독일 본에서 열리는 베토벤 페스티벌에 참가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며 지휘도 한다. 10월에는 유럽 연주 투어가 예정돼 있고, 잠시 손 놓았던 피아노 협주곡 작곡도 재개할 계획이다.
피아노와 작곡, 그리고 지휘까지 섭렵하는 그를 보자면 자연스레 ‘치열’, ‘욕심’이란 단어가 떠오르지만, 정작 본인은 “이제는 덜 절박하게, 즐기면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서형민은 “연고 없는 미국에서 힘들게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늘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며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답변에서는 ‘편안’, ‘소박’, ‘무난’ 같은 표현들이 유달리 많이 등장했다. 그는 “10대와 20대에 앞만 보고 달리느라 기복이 심했다면 30대에는 음악과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웃어 보였다. 치열했던 10대와 20대를 지나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30대의 새 챕터’를 써내려갈 음악가 서형민. 변하지 않는 것은 “관객의 발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무대를 선보이겠다”는 그의 다짐이다. 그것이 피아노 연주든 작곡이든 지휘든 말이다.
서형민은 11세에 2001년 뉴욕 필하모닉 영 아티스트 오디션에서 우승하며 뉴욕 필과 협연했고, 이후 2013 센다이 국제음악콩쿠르 준우승, 2017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우승, 2018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 우승 등의 성과를 내며 실력을 입증했다. 독일 하노버 국립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후 동대학원에서 올리비에 가르동을 사사하며 최고 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