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판사 성과평가 없애니…재판 '하세월'

실적 중심 승진제 폐지 후폭풍

사건병합 거부·영장심사 지연

1인당 사건 줄었는데 기간은 ↑

미뤄지는 재판에 불만 잇따라

새 법원장들 '공정·신속' 강조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A 씨는 최근 같은 사건 재판의 형사 증인으로 두 차례나 나와서 증언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았다. 각 재판 담당 판사가 사실상 하나의 사건을 병합하지 않은 채 따로 진행한 탓이었다. 증인 출석을 거부할 경우 A 씨는 수백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돼 ‘울며 겨자 먹기’로 법원 명령을 이행했다. A 씨는 “생업이 있는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하러 평일에 오라 가라 하는 게 황당하다”고 하소연했다.



‘성과주의’에서 벗어난 법원의 인사 제도 변화가 재판 지연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법 판사 승진 제도의 폐지에 이은 법원장후보추천제 도입으로 인사에서 성과 등이 평가되지 않아 재판이 늦춰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건 당사자나 변호인·검사 등은 사건을 맡은 판사들의 의욕이 떨어지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여기에 대법원이 압수 수색 영장을 사전에 심사하는 방안마저 추진하면서 재판은 물론 수사까지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20일 기동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실에 따르면 전국 지방법원의 판사 1명당 사건 수는 2016년 682.1건에서 2021년 542.2건으로 20% 줄었다. 반면 대법원의 ‘2022 사법연감’에서 민사 합의부 사건 1심 선고가 나는 기간은 2017년께 평균 약 265일에서 점점 증가해 2021년 평균 321.9일로 21%가량 길어졌다. 형사재판도 비슷한 추세로 판사 1인당 재판 건수는 줄어들고 있으나 오히려 재판 기간은 늘고 있다. 특히 사건 병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거나 구속영장 청구 후 심사까지 늦춰지는 등 법원 내 지연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말마저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구속영장 청구 시 불과 몇 년 전에는 2~3일 내에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 일정이 잡혔는데 요즘은 일주일 뒤까지 미뤄지기도 한다”며 “영장 전담 판사는 전에 비해 증가한 것으로 아는데 속도는 더 느려졌다”고 지적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도 “최근 대장동 사건과 위례 사건도 병합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아무리 혐의가 다르더라도 같은 결의 사건이고 증인들도 상당수 겹칠 것이기 때문에 이전이라면 병합 허가를 했을 것 같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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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 지연 등 현상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가 폐지된 후 생긴 ‘부작용’이라고 지적한다. 애초 지방법원 부장판사들은 재판 실적으로 평가받은 뒤 고법 부장판사로 승진하거나 법원장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이 해당 제도를 2020년 폐지했고 대신 법원장후보추천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해 올해는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고 있다. 이는 소속 판사들이 추천 투표를 거쳐 후보를 뽑으면 이 중 법원장을 결정하는 제도다. 성과로 평가받을 일이 없으니 재판이 지연되는 건 당연지사라는 게 법조계 안팎의 공통된 반응이다. 실제로 법원이 1년 넘게 선고를 내리지 못한 미제 사건은 2017년 3만 5111건에서 2021년 6만 7410건으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그 외에도 판사들의 업무 과중이나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회 풍조 확산 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법원 관계자는 “법원장조차도 판사들에게 재판을 빨리하라고 재촉하는 등 왈가왈부할 수 없다”며 “재판 개입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판사들이 전에는 자신의 선고와 상급심 판단이 같은지도 살펴보고, 재판 기간이 너무 지연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며 “결국 피해를 받는 건 국민들”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빨리하라는 말마저도 재판 개입으로 비칠 수 있어 마땅한 해법이 없다는 얘기다. 한 검찰 관계자는 “판사 수는 같은데 압수 수색 영장까지 심문해야 한다면 당연히 업무 과부하가 올 것”이라며 “압수 수색은 신속성이 생명인데 구속영장처럼 심문 일자가 늦어진다면 수사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이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하기 전 심문 기일을 정해 판사가 관계자를 심문하고 검사가 의견을 진술할 수 있게 하는 압수 수색 사전 심문 제도를 추진하는 게 수사 기밀 유출이나 증거인멸은 물론 수사 지연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란을 의식한 듯 새로 취임한 주요 법원장들은 일제히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강조하고 나섰다. 김정중 서울중앙지법원장은 이날 취임사에서 “신속하고 투명한 절차에 대한 국민 기대는 높고 법원은 현재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준 서울고등법원장도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항소심도 신속한 재판 원칙 적용에 예외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천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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