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세계는 냉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태에 직면할 것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글로벌 정치 지형을 이렇게 전망했다. 고립주의와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한 도널드 트럼프가 내년 1월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 무질서가 일상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각국의 리더십이 ‘자국 우선’을 강하게 요구받는 가운데 2024년 슈퍼 선거의 해를 휩쓴 ‘우파 물결’이 내년 한층 거세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29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총리직을 내놓을 위기에 처했다. 정책 연합을 맺었던 신민주당(NDP)이 불신임안 제출을 예고하면서다. 2015년 총리에 오른 뒤 3연임을 이어갈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던 그는 이민자 증가에 따른 주택 비용 상승과 인플레이션 장기화로 민심을 잃었다. 최근 총리 선호도 여론조사에서도 우파 성향인 보수당의 피에르 폴리에브 대표(31%)가 트뤼도(11%)를 한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가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조롱하는 등 국민 정서를 건드리고 나선 상황에서 이민·고물가 등 산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트뤼도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의 키어 스타머 노동당 정권도 극우 정당 추격 속에 성과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노동당은 올 7월 총선에서 14년 만에 보수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다. 하지만 스타머 총리는 경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리시 수낵 전 총리보다 더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영국 통계청(ONS)은 노동당 정부의 집권 첫 분기인 올해 3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초기 추정치(0.1%)보다 낮은 ‘제로(0)’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노동당 정부는 “15년 동안 방치된 경제를 정상화하는 건 우리에게 큰 도전”이라며 보수당에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2025년 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리더십이 휘청일 수 있다. 극우 정당의 기세도 심상치 않다.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는 나이절 패라지 주도의 영국개혁당은 올해 총선에서 창당 이후 처음으로 하원 진출에 성공했다. 2018년 창당한 신생 정당이지만 최근 여론조사 지지율이 두 자릿수까지 올라와 내년 5월 지방선거를 기대하고 있다.
내년 2월 조기 총선을 앞둔 독일에서는 불법 이민 차단을 앞세운 중도 우파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과 극우 독일대안당(AfD)이 선전하고 있다. 독일은 올라프 숄츠 총리의 중도 좌파 연립정부가 붕괴되면서 23일 의회가 해산됐다. 숄츠 총리가 조기 총선 승부수를 던졌으나 그가 속한 사회민주당(SPD)의 최근 지지율은 16%로 CDU·CSU 연합(31%), AfD(19.5%)에 이어 3위에 머물렀다.
우르줄라 뮌히 독일 투칭 정치교육아카데미 소장은 “지난 몇 년간 유권자의 우선순위가 급격히 재편돼 기후변화·사회정의 같은 이슈의 중요성이 줄었다”며 “이는 정부가 국제적 우선순위보다 국내 우선순위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돼 안보부터 환경까지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올해 슈퍼 선거의 해에 표심으로 증명됐다. 6월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인 프랑스 국민연합(RN)이나 AfD, 이탈리아형제들(Fdl)이 약진했다. 유럽연합(EU)의 4분의 3은 중도 우파 정당이 이끌고 있거나 적어도 우파 정당이 한 개는 포함된 연립정부가 집권한 상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낮은 경제성장률과 이민자 증가가 진보 정권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민족주의 증가로 이어졌다”며 “글로벌 정치의 진보적인 순간은 적어도 지금은 끝났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