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1일] 런던박람회

1851년 5월1일, 런던박람회 개막식. 거대한 전시장에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유리와 철골로만 지어진 축구장 11개 넓이의 3층짜리 전시장은 ‘수정궁전(Crystal Palace)’이라고 불렸다. 1만3,000여개 출품작도 관람객을 열광시켰다. 프로이센의 강철제 대포에서 미국 농기구, 오스트리아 가구, 프랑스의 고급직물과 스위스 시계, 인도 면제품 등 세계최고의 공산품이 자웅을 겨루고 고대중동의 설형문자 점토판과 중국 도자기가 선보였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전시장 절반을 차지한 영국관. 기관차와 선박용 엔진, 고속인쇄기, 공작기계는 다른 나라 제품을 압도했다. 10월 중순까지 계속된 박람회의 관람객은 연 620만명. 예상을 넘는 입장수입 덕에 발생한 흑자 18만6,000파운드는 박람회를 입안한 앨버트공과 빅토리아 여왕부부의 박물관 건립비용으로 쓰였다. 런던박람회는 경제사에도 올라 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인데다 ‘산업혁명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기 때문이다. 산업은 물론 발달된 통신ㆍ교통제도와 도시환경을 직접 목격한 세계인들은 각기 고국으로 돌아가 기술개발을 부르짖었다. 1848년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열기가 산업화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전기가 바로 런던박람회였다는 시각도 있다. 런던대회는 ‘전세계 산업 복음화대회’였던 셈이다. 런던대회 이후 만국박람회는 국력 홍보마당으로 바뀌었다. 프랑스는 박람회를 집중개최해 영국을 따라잡는 데 활용했다. 에펠탑도 파리박람회를 위한 임시조형물이었다. 독일과 미국이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하노버, 시카고 박람회 이후다. 한국은 규모가 작은 엑스포를 치러봤을 뿐이다. 2010년 여수대회를 노렸으나 상하이에 밀려 실패, 2012년을 기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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