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BIZ플러스 영남] 영·호남의 벽, 딛고 일어서다

정천석 울산 동구청장 '오뚝이 인생'<br>울산서 자랐지만 광주가 인생 전환점




[BIZ플러스 영남] 영·호남의 벽, 딛고 일어서다 정천석 울산 동구청장 '오뚝이 인생'울산서 자랐지만 광주가 인생 전환점 울산=김정숙기자 jskim@sed.co.kr 지난 2006년 정치입문 20년만에 단체장 자리에 앉은 정천석(사진) 울산 동구청장.그는 국내 최강의 노동계가 버티는 울산 동구에서 그것도 호남계열로 정치에 입문, 혈혈단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인물이다. 처음에 평민당으로 나선 후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에는 '경상도와 민노당'라는 거대한 벽을 뛰어 넘었다. 그는 "만일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내 인생 전환기'가 된 계기는 '광주' 라고 기록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85년 광주민주화항쟁의 처참한 광경을 비디오 속 거친 화면으로 접하면서 비로소 한국사회 전체를 향한 눈을 뜨게 됐지요. 청년으로서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호남 지역 색을 깨는데 작은 역할이 나마 하고 싶다는 결심으로 정치권에 입성한다.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평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지난 87년 정치에 입문한 그의 선택은 당시로선 무모한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예고된 가시밭길이었다. 한쪽에서는 경상도 특유의 보수 지역주의가 팽배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강성 노동운동이 들끓고 있었다. 그 같은 울산의 양분된 정치지형을 헤쳐가야 했기에 '호남 정당' 이름표를 단 정치인으로서 성공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나 마찬가지였다. 88년 총선출마에서 낙선했지만 91년 초대경남도의원 선거에서는 영남에서 유일하게 호남 정당 소속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다. 하지만 96년 총선과 98년, 2002년 동구청장 선거에서는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노동계 출신 구청장 후보와 맞붙어 무참하게 패배했다. 쉬운 길을 가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끝까지 홀로서기에 나섰다. 마침내 지난 지방선거에서 그는 한나라당과 민노당 후보가 버티던 울산 동구에서 무소속 후보로 당선된다. 정천석 동구청장은 "비록 선거에서 연이어 고배를 마셨지만 내 스스로 졌다고 포기하지 않는 이상 패배라 생각 지 않았다"며 "그 마음이 위기와 절망 때마다 나를 붙들어줬고 소중하고 값진 성공을 얻게 했다"고 말했다. "어디에도 연연해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야 포기할 때 포기하고 잡아야 할 때 움켜쥘 수 있습니다." 정천석(57^사진) 울산 동구청장은 고비 때 마다 일어서 온 자신의 '오뚝이 인생' 비결을"집착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두는 데 있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항쟁 현실을 접하기 전만 해도 그는 고향인 동구지역 새마을 금고 이사장으로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 았다. 새마을 금고 이사장은 그의 현실적인 문제였다면 30대 후반에 저지른 평민당 입당은 사회참여로 민주화를 이 뤄보겠다는 때아닌 열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총선에 출마해첫번째 고배를 마셨다. 지난 89년에는 현대중공업노조 '128일투쟁' 지지발언에 나섰다가'3자 개입 금지 조항 위반'이라는 이유로 구속돼 감옥 생활도 했다. 그 시절 그가 뼈저리게 아팠던 것은 구속 때문이 아니었다. 노모가 충격으로 실명해 세상뜨는 날까지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감옥 안에서 그는 처참한 마음을 시 쓰기로 달랬다.' 돌아앉은 모정'이라는 글을 통해'갈기갈기 찢기운 푼푼의 그 정이여'라고 울부짖었고, 감방 철창 너머 하늘을 보며 혼돈스런 세상을'네모로 찢긴 하늘'이라고 한숨지었다. 평민당이당이름을'신민당'으로 바꾼뒤91년경남도의원선거에 출마해 영남에서 유일하게 당선됐지만 96년총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낙선의 쓴잔을 또 마셨다.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노동계 출신 후보들과 '구청장' 자리를 두고 맞대결을 펼쳤다. 결과는 98년 선거와 99년 보궐선거에서 모두 패배였다. 뜨거운 열정으로 뛰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연이은 낙선에 그도 조금씩 지쳐갔다. 당 시절 동지들도 하나 둘씩 제 갈 길을 찾아 갔다. 휑한 맘에 주위를 돌아보니 아내와 아들, 딸뿐이더란다. 그때서야 가족을 비롯한'챙겨야할 현실'이 조금씩 보이더라고…. 2000년대 초반 "이제 정치는 접겠다"는 맘으로 지인이 소개한 한국윤활유협회 상근 부회장직을 맡아 서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가족들과는 처음으로 갖는 '일상의 행복' 이었다. '자연인 정천석'으로서의 시간도 만끽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로 출마 권유를 받고 2002년 다시 구청장 자리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출신인 이갑용 전 청장의 승리. 쓰라린 패배감이 몰려왔다. 무기력하게 누웠기를 몇날 며칠. 불현듯 자신을 찍어준 1만7,000여표 지지자들이 떠올랐다. 그는 그 때 인생의 '친구 같은' 책인 사마천의 '사기'를 손에 쥐었다. 학창시절부터 최근까지 네 번이나 탐독한 이 책은 무기력 하거나 좌절감에 빠질 때, 숨이 턱 막히는 정치적 위기 앞에 섰을 때 일어설 힘을 준 책이었다. 그는 책 속 제왕과 군웅들, 그드라마틱한 군상들 속에서 결단의 해법과 지혜를 빌렸고, 2006년 구청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져 마침내 성공을 거머쥐었다. 눈물겹도록 값지고 소중한'자리'였다. 그런 만큼 고향인 동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고 싶다. "어두운 밤길에 넘어져 다치는 주민이 없기를 바라는그런 맘으로 임합니다. 주민들이'구청장이 나와 똑같이 불편을 겪고 고민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주는 거죠.작은 것이지만 그 작은 신뢰관계에서부터 출발해야 앞으로 큰 사업을 추진할 때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고 갈등 조정도 가능합니다." 정 청장의 오뚝이 같은 인생 역정에는 부인 서길자(51)씨가늘함께 있었다. 정청장은 지난 83년부인의 젊은시절 선한 눈빛에서'인연'을 느껴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인에 대해 한마디 해 달라고 하자"돈 안되는 자신 인생에한마디 불평 없이 힘이 돼준 사람"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슬하에는 딸 다래(25)씨와 아들 다도(23)씨를 두고 있다. 자녀의 이름에도 그만의 철학이 묻어 있다." 딸 귀한 집안에서 여식을 얻자'만복이 다 왔다'며 다래(多來)라고 지었다"고 소개했다. 아들 이름 다도는 많을 다(多)자에 섬 도(島)자. "섬이 있으면 항해하는 사람은 쉴 수 있고, 난파한 사람은 목숨을 구할 수 있잖아요. 본인은 힘들겠지만 타인에게 그런 존재가 돼달라는 뜻에서 직접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는 '남원의 애수'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 광주'가 인생 전환의 계기가 된 데서 연유할 것일까. 노래를 너무 좋아해 90년대 말 전남 남원을 직접 찾아보기도 했다. 힘겹게 오른 단체장 자리인 만큼 그는 건강관리도 소홀히 하지않는다. 이른 새벽 동구 관내 곳곳을 걷고 달린다.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대왕암공원, 일산해수욕장 등에 나가 운동도 하며 현장에 문제가 없는지도 살핀다. 아침 운동이 곧 구청장 하루 업무의 시작인 셈이다. 그는 소주를 좋아한다. 거기엔 나름의 철학도 있다. 그는 소주가 '비움의 술'이기 때문에 매혹적이라고 했다. "자기만의 맛을 내세우기보다 스스로를 비우고 다른 안주의 맛을 살려 주는, 그래서 모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술"이라며 "술 중의 맹주"라고 호평했다.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정청장은 "보이기 위해 내 모습을만들어 내고 싶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나, 내색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앞으로또다른 고난이 오더라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내 천성을 잃지 않고 말이죠"라고 말했다. • 영·호남의 벽, 딛고 일어서다 • 울산 동구는 어떤곳 • 거미줄처럼 연결된 100여개 정유탑 '장관' • 산업용 압력용기 전문기업 일신테크 • "올해는 中·베트남 진출 원년" • '슈가버블' 개발한 그린케미칼 소재춘 사장 • "지역 문화·스포츠 요람 역할도 할것" • 울산에 분양가 3.3㎡당 1,500만원대 아파트 外 • "반세기 쌓아온 신용이 가장 소중한 자산" • 유망기업 잇달아 유치… 대구, 경제활성화 기대 • "무공해 웰빙식품 매생이로 승부건다" • "건설사도 생존 하려면 신용·기술력 겸비해야" • 경남, 하동지구 개발 1兆5,000억 민자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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