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장자와 똑같은 필체를 갖고 있다면 백만장자처럼 행세할 수 있을까? 미국의 여성 추리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소설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에선 가능했다. 이 소설은 1960년에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로 제작됐고, 1999년에는 '리플리'라는 영화로 리메이크돼 큰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청년 톰 리플리와 샌프란시스코의 부잣집 외아들 필립 그린리프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고교졸업 후 리플리는 자신을 멸시해온 그린리프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증명서를 위조한다. 또 그린리프의 서명을 똑같이 흉내 내며 친구의 돈을 인출하고 새 아파트를 얻는다. 이는 그린리프의 서명을 열심히 연습하며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결과다. 하지만 요즘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필체감별기술 때문이다. 사람의 필체는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고, 자신도 똑같은 글씨를 되풀이하기 어렵다. 그래서 두 서명이 너무 똑같아도 위조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서명이라도 정확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만일 두 서명의 형태가 정확히 일치한다면, 분명 그 중 하나는 위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필체감별은 어떻게 할까? 위조 여부를 가리기 위해 감정관들은 먼저 동일한 사람이 쓴 편지나 공문, 메모 등 다양한 필체를 확보한다. 이어 글씨가 꺾일 때의 각도, 필순, 특정한 습관 등을 다양하게 분석한다. 동일인이 쓸 때는 그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만의 독특한 '공통적인 습관'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같은 사람이 비록 다른 글씨체로 쓰더라도 '공통적인 습관'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를 조사하면 누가 썼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필체 감별의 조사법에는 일반적 규칙이 없으며 얼마나 많은 특성이 일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동안 오랜 경험을 가진 감정관의 판단에 따라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방법으로 감별을 해왔다. 이 때문에 종종 '감별불가'라는 판정이 내려진다. 다행히 2004년 8월 로마의 한 물리학자 덕분에 앞으로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필체를 감별할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 로마트레 연구대학 전기공학과의 주세페 스파뇰로 교수팀은 필적 샘플에 레이저 광선을 비춰 3차원의 입체상을 만든 뒤 그 특징을 알아내는 홀로그램 시스템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글씨로 새겨진 종이의 홈과 도랑을 영상으로 컴퓨터에 재현해 3차원 필적 경로 홀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두 획의 연결점, 예를 들어 숫자 8의 중간 부분에서 종이에 가해진 필자의 압력에 의해 생성된 변화나 획순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알파벳 E를 쓸 때, 'ㄷ'를 쓴 뒤 가로획을 그은 것인지 '三'을 쓴 뒤 왼쪽을 막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필체를 위조하는 방법 중 하나는 본래의 글씨 위에 종이를 대고 베껴 쓰는 것이다. 위조범이 비슷한 필체를 흉내 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림일 뿐이며 원래의 필자처럼 획을 그을 때 힘을 주는 압력의 변화까지 따라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힘을 많이 준 부분은 언덕으로 적게 준 부분은 계곡으로 나타나는 3차원 기술은 복잡하던 필체 감별을 손쉽게 해결하게 됐다. 이 기술은 무엇보다 종이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연구팀은 여러 종류의 종이와 펜을 이용해 수백 개의 필적 샘플을 3차원 홀로그램 기술로 분석해 봤다. 그 결과 3차원 필적 경로 홀로그램 시스템은 문서와 수표에도 적용이 가능하며 거의 모든 위조를 성공적으로 감지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