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 체벌 없는 학교 만들자

최근 폭력에 가까운 체벌을 받은 학생의 피해가 보도되면서 학교에서의 체벌금지에 관한 논쟁이 다시금 불거지고 있다. 체벌 문제를 다양한 교육방법 중 하나에 대한 교사 개인의 교육철학 차이쯤으로 단순화하기에는 체벌이 당연시되는 교육환경이 우리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소년들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 너무 크다. 체벌이 금지돼야 하는 이유는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통제적인 학습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의 미래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적 폭력에 둔감해지고,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성인이 된 후에도 타인을 통제적으로 다루게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바람직한 행동이나 태도를 형성하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행동을 일시적으로 억제한다는 사실이 이미 학문적으로 입증됐다. 이론적으로 체벌이 효과적이려면 수십여 가지 조건이 만족돼야 하는데 이 모두를 현실적으로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체벌은 초능력과 같아서 그 효과를 믿는 사람의 눈에만 효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미신적 강화이고 플라세보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체벌은 권위적 폭력의 정당화, 교사와 교과목ㆍ학교를 싫어하게 되는 혐오조건화 등 심각한 부작용을 수반하므로 교육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체벌을 하는 까닭은 체벌 받는 학생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고 체벌이 그 학생의 행동을 바꾼다고 믿어서도 아니다. 매를 드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면서도 즉각적인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즉각적인 효과란 체벌이 주는 공포감과 불안감으로 인해 나머지 학생들의 행동이 통제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체벌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체벌 받는 학생을 희생시켜 다른 학생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하는 꼴이므로 사랑이나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죄수를 다루는 감옥이나 식민지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적이고 통제적인 체제유지 방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역시 체벌의 효과가 아니라 체벌을 받지 않는 학생에게 주어지는 강화의 효과인 셈이다. 교육적 체벌이나 초달(楚撻)과 같은 사랑의 매란 허구의 개념이다. 진정 학생들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학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실추된 교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체벌을 허용해서도 안 된다. 체벌을 해야만 회복될 교권이라면 그 권위는 학생들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 뻔하다. 체벌 없는 학교를 꿈꾸는 것은 이상주의적 발상이 아니다. 오히려 체벌이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무기력한 패배주의의 발로이다. 실제로 일부 학교에서는 체벌의 대안으로 공개사과, 벌점제, 봉사활동 참여 등의 처벌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이것도 체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학습자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 칭찬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매를 들지 않고도 학생들의 자기조절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배움터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 전체가 일관성 있는 처벌규정과 강화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한 교사의 체벌이 체벌하지 않으려는 많은 동료 교사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떠넘겨져서는 안 된다. 체벌하는 교사가 오히려 열의 있다고 믿는 학생들, 체벌이 자신의 인생을 바꿔줬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부모들, 체벌이 없으면 학교가 어떻게 되겠냐고 아우성치는 교사들, 체벌이 있어야 교권이 바로 선다고 믿는 사람들이여! 인간의 잘못된 행동과 태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매로 이뤄질 수 있다면 교육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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