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기업구조조정 겉돈다] 비슷한 기구들 실적없이 '허송세월'

되는 일은 없으면서 간판만 늘어나고 있다. 'CRCㆍCRFㆍCRV' 등 엇비슷한 '민간구조조정기구'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법 마련으로 생겨난 이들의 설립 취지는 단 한 가지다.'정부 주도의 구조조정을 민간 자율에 넘긴다'는 데 있다.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2월 말 4대부문 구조조정이 마무리됐다며 강조한 '시장 자율에 따른 상시구조조정'도 이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 이들의 역할은 단순한 '투자가' 차원에 머물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용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산업자원부는 기업구조조정 전문회사(CRCㆍCorporate Restructuring Company)를 만들면서 '공적 자금 투입에 의한 구조조정에서 벗어나 시장과 민간의 자율적 판단에 따른 구조조정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재경부도 지난해 11월 '기업구조조정 투자회사(CRVㆍCorporate Restructuring Vehicle)'법을 제정하면서 '워크아웃 제도의 완결보완판'이나 '구조조정의 민간화ㆍ상업화'라고 말 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겉돌고 있다. '구조조정'을 위한 장기투자보다는 단기차익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기업구조조정 증권투자회사(CRFㆍCorporate Restructuring Fund)는 주식시장이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자 투자를 기피하고 있으며 CRC는 사실상 창업투자회사로 전락한 듯한 모습이다. CRV는 관련법이 통과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 또 하나의 '민간구조조정 기구'가 탄생을 앞두고 있다. 바로 부동산관련 구조조정펀드다. ◇제 기능 못하는 CRF CRF는 구조조정이 필요한 중견ㆍ중소기업이 발행시장에서 내놓은 주식을 인수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설립됐다. 논란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설립취지대로 운영되는 듯했다. 그러나 주식시장이 침체하면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4개 투자펀드의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신규투자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부실채권을 인수해 증시 침체기에 안전판 역할을 맡아야 할 CRF가 증시 부침과 자산운용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서울부채ㆍ아리랑ㆍ무궁화ㆍ한강 등 4개 CRF는 지난해 4ㆍ4분기 서울부채를 제외하고는 20~48%의 적자를 발생하며 구조조정에 오히려 짐이 되고 있다. ◇CRC냐 창투사냐 산업발전법을 근거로 출발한 CRC는 당초 부실회사의 자산을 인수한 뒤 클린화해 기업을 회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월 말 현재 62개 기금ㆍ조합이 인수한 부실채권잔액은 1조3,636억원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대부분이 기존 회사의 부실자산을 인수한 것이 아니라 창업투자회사 또는 유망한 신설법인의 주식투자가 차지하고 있다. 부실하지만 회생가능성 있는 회사의 채권을 매입함으로써 구조조정을 촉진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한 당초 취지와는 달리 역시 돈 되는 곳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금융회사도 아니고 상법을 근거로 설립된 일반회사 CRC에 각종 세제혜택을 부여했던 정부의 정책의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산업자원부 당국자는 "일부 벤처투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부실자산 처리에 전념하도록 법개정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손님 없는 CRV 특별법까지 만들어가며 추진했던 재경부의 작품이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CRV는 워크아웃 대상기업의 부실채권을 유동화하는 제도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법이 통과돼 설립추진사무국까지 구성돼 있지만 그 성과는 아직 미지수다. 금융기관들이 부실자산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담보를 확보한 은행과 그렇지 않은 은행, 은행과 2금융권간 견해도 엇갈리고 해당기업의 노조와 대주주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다급해진 재경부는 최근 관계자회의를 소집해 CRV 태동을 독려하고 나섰으나 실제 출범은 요원한 상태다. ◇정부부처간 주도권 다툼이 혼란 야기 지난해 10월 재경부와 산자부는 신경전을 벌였다. 당초 'CRC든 CRV든 통일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묵살되자 산자부는 "CRV법의 내용이 어찌됐든 '기업구조조정'이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고 주장했고 재경부는 CRV법 제정을 강행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부처가 관여하지 않는 제도는 제도가 아니다'는 공무원의 부처이기주의가 깔려 있다. 최근에는 재경부와 건교부가 부동산 관련 입법을 두고 다투고 있다. 건교부가 별도 입법을 추진 중인 반면 재경부는 CRV법에 부동산 관련부문을 포함시켜려는 것이다. ◇시장 가격 회복이 실마리 얽히고 설킨 정부 부처간 이해 다툼과 각양각색의 제도와 법령을 단순화하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길은 간단하다. 부실자산의 가격 결정을 시장에 맡기라는 것이다. 부실자산 정리의 일차적 책임을 맡고 있는 자산관리 공사의 한 관계자는 "가격 결정만 제대로 된다면 은행과 자산관리공사의 계약만으로도 부실자산 처리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다"며 "헷갈리는 중구난방의 제도는 부처간 영역다툼과 필요 없는 경쟁의 부산물"이라고 지적했다. 권홍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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