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장에서 다수의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날 경우 맞서 싸우기보다는 경쟁사에게 사업를 팔아 넘기는 게 현명한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른바 ‘퇴출전략(exit strategy)’이다. 산업구조 개편을 유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하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전략이다.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년 동안 다른 금융산업과 달리 제대로 구조조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 증권업계라면 더욱 그렇다.
과거 금융감독 당국의 수장이 때때로 증권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경쟁력 없는 증권사는 스스로 매각ㆍ합병을 단행하는 퇴출전략이 필요하다고 다그쳤었다. 하지만 최근 은행은 물론 비금융 주력 기업들까지 증권업 진출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을 보면 ‘마이너들’에게만 강권할 것은 못 된다는 생각이 앞선다.
금융감독 당국은 내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에 앞서 현행 증권거래법상 마지막으로 13곳을 심사해 상반기 내 증권사 허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실상 묶여 있던 설립규제를 푼다는 의미겠지만 증권사 난립으로 더욱 열악해지는 영업환경을 걱정하는 기존 주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현재 국내 증권사만 35곳. 신청한 곳이 다 허가를 받는다고 가정하면 외국계까지 합해 67곳에 달해 외환위기 이후 최대 수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증권사 숫자를 늘려 자발적인 인수합병(M&A)을 유도한다는 감독 당국의 복안에 한편으로는 머리가 끄덕여지지만 증권사 스스로 퇴출을 용인할 수 없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자기자본이 5,000억원 미만인 중소형 상장 증권사 10곳의 2007회계연도 순이익이 각 사별로 200억~500억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주식시장만 좋으면 망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오히려 버티면 버틸수록 올라가는 경영권 프리미엄이나 ‘함량미달’ 증권사가 나올 경우 금융상품이나 서비스 관련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따라서 문턱을 낮추면서 발생할 수 있는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엄격한 진입기준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최근 전광우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증권업계 사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증권사가 난립될 경우 대형 투자은행(IB)의 등장이 더 어려워질 것이란 업계의 지적에 대해 “진입요건 완화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규 진입 수요를 충족시키겠다는 감독 당국의 명분이 오판의 빌미를 제공할 만한 것이라면 지체 없이 바꿔야 한다. 규제완화를 ‘버티기’전략을 연장하는 호기 정도로 여긴다면 증권업계에서 모처럼 일고 있는 대형화 의지마저 꺾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