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우리는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를 초래한 책임이 있다." '규제 완화'에 목청을 높여온 미 증권거래위원회(SEC)가 통렬한 반성문을 내고 투자은행(IB)에 대한 자율규제 프로그램을 스스로 파기했다. 미국 의회에서 추진 중인 감독체계 개편에 따라 축소될 위상을 예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8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SEC의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은 "지난 6개월동안 월가에서 벌어진 일들은 '자율규제 프로그램'(Voluntary Supervision Program)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면서 "이 감독제도는 근본적으로 결함을 안고 출발했다"고 실토했다. SEC의 데이비드 코츠 감사관도 지난 26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SEC가 베어스턴스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위험신호(red flag)를 놓치고 리스크를 억제하도록 요구하는 것에 실패했다"면서 "거래와 시장을 감독하는 SEC부서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SEC의 감독을 받는 금융회사의 3분의 1 가까이가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다. 또 서류를 제출한 금융회사에 대해서도 SEC가 상당수 자료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감독 소홀로 인해 금융기관의 브로커-딜러 부문의 리스크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고 SEC는 금융 시장의 약점을 사전에 파악하거나 적절한 대응 조치를 취하는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SEC의 규제 완화가 시작된 것은 1999년. 당시 '그램 리치 브릴리 법'이 통과돼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하게 구분하던 대공황 이후의 감독 중심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투자은행 전성시대가 막이 오르게 된다. 법에 따라 SEC는 투자은행을 감독하게 됐다.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이 2004년에 발동한 자율규제프로그램. 유럽연합이 2002년 외국 자회사에 대해서도 규제 권한을 갖도록 하자 월가에선 오히려 유럽연합에 상응하는 기관에서 규제를 받을 경우 이중규제를 안받도록 한 점에 주목한 것. 투자은행들은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된 뒤 SEC가 지주회사를 감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로비에 나선 것.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골드만삭스를 이끌었던 헨리 폴슨 재무장관 등 월가 5대 투자은행이다. 그 결과물이 2004년의 자율규제프로그램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규제 장치가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것이란 기대는 무리였다. 월가 투자은행들은 SEC에 입김을 넣어 규정을 자신들 입맛에 맞도록 바꿨고 온갖 규제를 피해갈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자율규제프로그램을 더 이상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5대 투자은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베어스턴스는 지난 3월 JP모건체이스로, 메릴린치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매각됐다. 리먼브러더스는 파산했고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이름은 남았지만 은행지주회로 전환됐다. SEC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SEC는 규모가 작지만 독립 감독기구로서 위력을 떨쳐왔다. 하지만 투자은행이 잇따라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이제는 미래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WSJ는 의회와 차기 행정부가 금융위기 이후의 감독체계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SEC의 장래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해온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우군인 공화당이 이긴다고 해도 시련은 피하긴 힘들다.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은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을 이번 금융위기의 책임자로 규정하고 "집권 후 반드시 경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