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새 정부의 재벌ㆍ경제정책에 대해 `원칙적 수용` 입장을 밝힌 것은 정부에 유화적 메시지를 던짐과 동시에 기업에 부담이 되는 부분은 적극적 대안 마련을 통해 실리를 취하겠다는 포석이 깔려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SK사건이 불거진 상황에서 정부정책에 무작정 반대할 경우, `반(反)재벌 정서`라는 후폭풍이 닥쳐올 수 있다는 부담이 결정적이다.
◇개혁의 반대세력으로 몰리는 것은 두려운 것이 사실= 전경련 관계자는 “신정부 출범에 앞서 재계 차원에서 출 수 있는 `선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는 22일 5단체 상근부회장간 모임에 이어 서둘러 경제단체 회장단 회동을 추진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SK사건은 재계의 입장 선회를 앞당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소극적으로 대응할 경우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투영되고, 사정의 칼날이 재계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진 때문이다. 재계가 정부의 강공책에 사실상 `백기(白旗)`를 들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총론 수용, 각론은 보완= 재계의 입장은 한마디로 총론은 수용하되,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마련해 전제조건으로 내걸겠다는 것이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종전 2개의 조건을 내걸었다면 1개는 다른 수준에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재계의 입장이 대폭 후퇴했음을 시사했다.
우선 3대 재벌개혁 과제에 대해선 사실상 수용키로 의견을 모았다. 집단소송제의 경우 남소(濫訴)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이 초점이다. 18일 임원회의에선
▲소송을 통해 기업에 불필요한 피해를 입혔다면 원고도 상응한 피해보상을 하며
▲구체적인 소송요건을 마련하기 위해 법학자들의 자문을 받기로 했다. 형사소추를 받은 상장사에만 집단소송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강화와 관련, 전경련 관계자는 “공정위가 이미 정답을 제시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상속ㆍ증여세 포괄주의도 정부의 방안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대세다. 한 단체 임원은 “(오너의 이해가 걸린 문제를)기업문제로 다루는 게 부담”이라며 “다만 위헌소지가 있는 점을 감안해 법학자들의 자문을 얻어 판단키로 했다”고 전했다.
재계에서는 반대 명분이 약한 상속세 포괄주의와 출자총액제는 수용하되, 집단소송제는 기업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절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여타 경제정책부분도 원칙적으로 수용하되,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걸린 만큼 상황을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주5일 근무제는 대기업의 경우 올해부터 실시키로 했다. 대신 휴일ㆍ휴가제도 개선과 초과근로 할당제, 중소기업 시행시기 등을 놓고 요구조건을 분명히 할 계획이다. 외국인 고용허가제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반대가 거센데다 정부가 현재 산업연수생 제도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한 상태여서 새 제도 시행여부를 본 뒤 공식 입장을 정리키로 했다.
◇3월 이후 세부 논의 본격화할 듯= 재계가 이처럼 정부 정책에 대해 전체적 방향에서 `수용`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하면서 정ㆍ재계간 대립은 당분간 휴지기에 들어갈 공산이 크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새 내각이 구성되면 정부의 입법 논의가 본격화할 것으로 본다”며 “테스크포스 구성 등을 통해 재계 차원의 세부적인 방안을 만들어 재계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이에 따라 오는 5~6월께 구체적인 개혁 방안을 놓고 정ㆍ재계간의 치열한 줄다리기가 다시 한번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김영기기자 you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