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데스크 칼럼] 갤브레이스의 후회와 한국

미국의 33대 대통령 트루먼이 하버드대학의 신예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물가와 임금을 잡아달라고 요청했을 때의 얘기다.젊은 갤브레이스는 기쁨을 억누르고 겸손을 떨었다. 『각하,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 더 적격인 경제학자들이 최소한 10명은 넘을 겁니다.』 그러자 트루먼대통령이 고함을 질렀다. 『누가 그걸 모르나.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청년시절까지 유약한 편이었던 갤브레이스는 왜곡된 민주주의와 부패한 자본주의에 눈을 뜨면서 크게 달라졌다. 하버드대 교수·대통령 고문·소설가·사회평론가 등의 직업을 두루 거치면서 「논란제조기」로 불릴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런 그가 최근 과거사에 대해 후회섞인 고백을 토로, 주목을 받았다. 미국 36대 대통령인 린든 존슨대통령의 강력한 비판자였던 그는 지난 주말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한 강연회에서 『오랜 숙고끝에 존슨이 빈부간의 평화적 공존과 복지에 필수적인 사회정책을 추진한 공로가 크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다음가는 대통령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을 시작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린든 B. 존슨의 업적에 대해 당시 가장 신랄한 비판자였고 선거전에서 반대편에 섰던 그였기에 비록 한참 뒤이지만 존슨에 대한 재평가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존슨과 친구사이였던 그는 67년 당시 베트남전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존슨의 재선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 민주당내에서 반(反)존슨파 진영을 구축,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다 존슨과 대판 논쟁을 벌인 뒤 전화통화 조차도 기피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었다. 사실 갤브레이스는 국내에서 경제학자로 더 유명하다. 「전시효과」로 잘 알려진 그는 역작인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어떤 사회가 보다 역동적으로 진보·발전하지 못하는 경우 거기엔 반드시 기득권층의 음모가 존재한다』고 했다. 황폐한 공원과 빈민가 사이로 번쩍이는 리무진이 돌아다니는 미국의 현실을 가장 개탄한 인물이 바로 갤브레이스다. 갤브레이스의 대기업관은 더욱 「삐딱」하다. 대기업은 광고를 쏟아부어 소비자의 욕구를 조작하며, 관리들에게는 뇌물을 주고 부패시킴으로써 규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대기업 경영자(TECHNOSTRUCTURE)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정부의 정책까지 지배하려고 한다. 이것이 갤브레이스가 그리는 신산업국가(NEW INDUSTRIAL STATE)의 특징이다. 산업사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인 60년대말에 나온 갤브레이스의 이같은 견해는 자본주의의 결말이라기 보다는 산업사회에서 한번쯤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연으로 이해된다. 이를 극복한 국가는 자본주의의 「승리자」이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지금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늘날 미국 수출총액의 반 이상은 종업원 19명 이하의 회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종업원 500명 이상의 회사는 수출총액의 7%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포천지 선정 500대 회사의 경제생산은 70년 GDP대비 20%에서 지금은 10%에 불과하다. 또 해마다 100만개 이상의 중소기업이 태어나고 있다. 그럼 한국은 어떤가. 지금의 한국은 갤브레이스가 신산업국가론을 거론하던 미국의 70년대와 유사하다. 한국도 이제 자본주의의 시험대에 본격적으로 올라선 것이다. 「IMF사태」와 「대우사태」를 겪으면서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졌지만 여전히 재벌의 힘이 막강하다.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재벌의 경제력집중이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다. 특히 10대 주력산업은 4대 재벌이 완전히 장악했다. 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어두운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벤처기업이 활발히 창업되고 이들의 자금줄인 코스닥시장은 나날이 사상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산업조직으로 성장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거품의 요소도 많다. 갤브레이스는 「논란 제조기」로 불릴 정도로 많은 주장들을 폈다. 그래서인지 틀린 이론도 꽤 된다. 미국은 갤브레이스의 「신산업국가론」을 한물간 이론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와 개발도상국들은 아직까지 그의 이론을 답습하고 있다. 갤브레이스가 존슨을 재평가했듯이 그의 경제이론에 대해서도 언젠가 재평가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재 시험대에 올라있는 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의 재벌과 관료들이 변하지 않는 한 쉽사리 뒤집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뒤집든 말든 우리로선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이론에 따르는 국가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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