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노무현, 대통령후보되기까지

빈농의 막내…청문회 스타…역경헤치고 '盧風' 창조빈농의 막내에서 신데렐라처럼 어느날 갑자기 한국정치의 핵심인물로 부상한 노무현 후보는 소신 있고 소박한 정치인이다. 노 후보는 어린시절과 변호사시절, 정치활동 과정 등 그동안 인생행로에서 이 같은 이미지를 구축, 결국 국민참여 경선에서 '노무현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집권당 대통령 후보로 우뚝 섰다. ◇ 어린시절 노 후보는 찌든 가난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가난과 역경이 오늘의 자신을 있도록 해준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60년 2월 경남 김해 진영중학교 1학년 때 이승만 대통령 생일기념 글짓기에서 '택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란 냉소적 제목을 달았다가 퇴학위기까지 몰렸다. 부산상고를 나와 농협취직시험에 떨어져 작은 어망회사에 들어갔으나 한달만에 때려치우고 귀향한 노후보는 큰 형의 뜻을 이루기위해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력이 말해주듯 명석한 두뇌는 학창시절부터 주변으로부터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생활기록부에는 '불안하다' '튄다'는 현재의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일부의 평가도 이미 나타나 있다. ◇ 인권변호사시절 노 후보는 판사 8개월만에 "따분하다"며 걷어치우고 변호사로 개업, 평범한 변호사로 활동하다 81년 부산 민주화ㆍ학생운동 관련 사건이었던 '부림사건' 변론을 맡아 고문당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권ㆍ노동변호사로 변신했다. 87년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혐의로 구속되고 변호사업무 정지처분까지 받았다. ◇ 정계입문 및 정치역정 88년 4.26 총선(13대)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5공 실세 허삼수 후보의 대항마로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달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88년 5공 청문회에서 다른 여야 의원들이 깍듯이 예우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그러나 89년3월 당시 여당인 민정당의 5공 청문회 참석거부에 항의, 의원직을 내던졌다가 '패기 있다'는 격려보다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난받고 결국 17일만에 사퇴를 번복하는 해프닝을 빚어 정치 현실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90년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합류 권유를 "역사적 반역"이라며 뿌리치는 정치적 소신을 고수했다. 꼬마 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신민당간 야권통합에 참여한 후 92년 총선에서 '김대중 깃발'로 허삼수 후보와 재대결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이후 15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를 선택, 98년 7월 보선에서 종로에 재도전, 재선의원이 됐다. 하지만 2000년 4ㆍ16총선에서 부산 강서을에 출마했으나 낙선, 지역주의에 맞서 세차례나 고배를 마셨다. ◇ 노무현 돌풍 태동 노 후보를 아끼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네티즌들이 모여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하는 계기가 됐으며 인터넷 초고속망을 타고 '바보 노무현'으로 애정어린 주목을 받으며 노풍을 태동하게 됐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 국정경험을 쌓는 기회를 얻고 여권 대선주자의 한사람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인제 대세론'에 묻혀, 검증을 거치지 않은 벤처기업에 비유됐다가 마침내 대통령후보로 뽑혀 절반은 성공했다. 양정록기자 구동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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