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바보의 벽

지난 2003년 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바보의 벽’이라는 책 내용을 읊고 다녔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겐 “바보의 벽에 막혀 정책의 당위성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아예 듣지 않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바보의 벽은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몇 개월 만에 수백만부가 팔려나갔다. 평생을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을 전공했던 요로 다케시 도쿄대 명예교수가 쓴 이 책은 인간의 뇌 속에는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보를 차단해버리는 벽, 이름하여 바보의 벽이 있다는 게 골자다. 이념 논쟁으로 소통 단절 요즘 고이즈미 총리가 주변국의 반발 속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해 한일, 일중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다. 자신의 소신인지도 모르지만 한 두 해의 문제도 아닌 사안에 대해 주변국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면 그 스스로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의 벽에 막혀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비난은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이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가 정체성 문제와 색깔 논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 방향도 엉뚱하게 튀고 있다. 한 대학교수에 대한 불구속 수사 지휘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법무부 장관과 검찰의 ‘민주적 통제’와 ‘중립성 훼손’논쟁이 여야, 진보ㆍ보수간 이념 논쟁으로 비화돼 이젠 쉽사리 타협점을 찾기 힘들게 됐다. 서로 밀릴 수 없는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게 그리 중요한 문제인가. 경제회복의 불씨가 이제 막 살아나기 시작하는데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념 카드를 꺼내 들었으니 말이다.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혁명을 이끌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의견이 엇갈릴 때 구동존이(求同存異)라는 논리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견은 일단 미뤄두고 의견을 같이하는 분야부터 협력해 처리한다는 것이다. 실리와 실질을 추구하는 중국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것이다. 여야, 보수와 진보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는 분야는 경제활성화이고 어느 누구도 이 문제에 이견을 달지 않는다. 이념적인 문제는 서로 태생이 다른 만큼 단시간에 합일(合一)을 이뤄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우리 경제가 회복기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방치해도 괜찮을 정도로 그 기운이 왕성하지 않다. 정부가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하는 주식시장도 위태롭다. 외국인의 계속된 매도공세로 주식시장 랠리의 종막이 우려될 정도다. 이러다가 주식시장마저 꺼지면 정부는 어떤 논리로 경제가 괜찮다고 설명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런 불안조짐을 차지하고라도 대다수 일반인의 주된 관심사는 생활고 타개와 노년 대책, 그리고 자녀 교육과 세금 문제이지 결코 이념과 사상문제가 아니다. 갈수록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선진국보다도 빠르게 노령화돼 어느 순간 노인들이 넘쳐 흐를 것이라는 사실이 어려운 현실뿐 아니라 미래까지 옥죄고 있다. 명분보다 실리 추구 분위기를 18일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1차 월례토론회 내용은 그런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정창영 연세대 총장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10년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마지막 기회의 창”이라며 “1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정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분 싸움보다 실질을 숭상하는 기운이 널리 확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전으로 인해 비관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지만 비관론보다는 조심성 있는 낙관론이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질보다 명분싸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선 조심성 있는 낙관론은커녕 비관론을 더 키울 가능성이 높다. “바보의 벽은 자기가 믿는 것만 들으려 하고 항상 내가 옳다는 착각을 한다”는 요로 다케시 명예 교수의 주장처럼 지금의 대치국면과 소모전을 이어간다면 이 정권은 물론 야당 역시 “아무리 얘기해도 귀를 닫아버리는 바보의 벽에 막혀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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