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발언대] 비판넘어 희망으로

작게는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로부터 크게는 중후한 언론 기사의 모습을 띤 비판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온통 비판의 성난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하지만 ‘비판으로는 멀리 갈 수 없다’는 개인적 명제를 매번 확인하게 된다. 그 이유는 ‘희망’의 존재 때문이다. 비판은 그릇된 것을 드러나게 해주지만 희망은 상처를 치유하고 그 위에 꽃을 피우기 때문이며 결국 우리를 키우는 것은 비판이 아닌 희망이라고 믿는다. 비판의 힘을 과도하게 맹신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착안점은 이렇다. 첫째, 희망이라는 것은 바람직한 비판에 개선과 실천의 의지가 포함된 보다 앞선 개념인 것을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둘째, 비판의 조건에 대한 것으로서 비판이 그 비판으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주체로부터 제기돼서는 깊은 공감과 울림을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이다. 셋째는 용서와 비판의 상승 효과이다. 때로 가혹한 비판은 과거 구석구석을 들추고 다니며 관용의 기회를 주지 않지만 용서는 과거의 행위를 참회할 기회를 주거나 이미 참회한 이를 용서해줌으로써 다시 희망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와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무색ㆍ무미ㆍ무취의 존재를 찾는 이라면 박물관에 가보라. 박제화되고 동상화된 존재는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살아서 움직이며 불완전하지만 완전을 지향하고 충돌로부터 화합을 이끌어내며 무질서로부터 질서라는 구체적인 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도록 하자. 혼란으로부터 희망을 꽃피워낼 이는 아마도 무수히 많은 좌절을 통해 도전과 응전의 의미를 알고 교훈과 반성의 힘을 몸으로 체득한 사람일 것이다. 어렵지 않다. 지금 당신이 비판의 대상으로 겨냥하고 있는 상대방이 인터넷 기사 속의 짤막한 댓글이든 당신의 아이들이거나 아니면 누구나 알만한 거물이든 거기서부터 시작하도록 하자. 익숙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비판 너머의 희망을 향해 손을 내밀고 싶다. 머지 않아 희망을 얘기하는 소리가 퍼질 것이며 희망의 소리가 울대를 울려 노래가 샘솟고 그 노래가 강물처럼 흘러 굳은 땅 위에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의 당신 모습이 바로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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