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12월 18일] 금융위기와 미국의 지위

지난해 여름부터 필자는 1년 동안 미국 스탠퍼드 대학 아태연구센터(APARC)에서 연구년을 보냈다. 미국 생활은 학위 이후 14년 만이었고 대학원 시절을 동부에서 살았던 필자에게 서부에서의 생활은 처음이었다. 기간도 짧았고 접했던 미국인들도 별로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서 받았던 대체적인 인상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그들은 겸손하지도 않았고 그다지 관용적이지도 않았다. 여기가 정말 미국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필자로서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세계적 우위 지속될 가능성 높아 미국인들이 달라진 것 같다는 필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14년의 세월 때문인지, 동부와 서부의 지역적 차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9ㆍ11 테러가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보기도 했다. 살코기뿐 아니라 굳이 싫다는 뼈까지 팔겠다고, 마지막 끝전까지 이익을 챙기겠다고 한국과의 쇠고기 협상을 밀고 당기는 모습은 어쩐지 쩨쩨해보였다.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겪을 당시 일본을 다녀오셨던 대학 은사님께서 ‘일본 사람들이 달라진 것 같다. 예전만큼 친절한 것 같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아하! 정말로 미국은 기울어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난 10여년에 걸쳐 중국ㆍ러시아ㆍ일본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보다 활발한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사이 미국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특히 경제력을 앞세운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변화할 가능성 때문에 미국은 속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세계로 번지면서 미국의 체면은 크게 손상됐다. 지난 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일자리를 없애고 퇴직연금에 피해를 준 점에 대해 자책의 뜻을 밝혔다. 미국인들에게 한 말이었지만 전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도 사과로 들렸다. 게다가 앞으로 달러화가치는 더더욱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화폐가치 하락은 경제적 힘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소련 붕괴 이후 지금까지 미국이 누렸던 글로벌 초강대국의 지위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으며 국제질서도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변해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자가 아니라 이코노미스트인 내 눈에도 이런 예측이 당장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극히 적어보인다. 지금으로서는 미국을 대체할 만한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는 한 경제력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여전히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달러화는 여전히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강대국의 또 다른 요소인 군사력과 과학기술력 분야에서도 미국은 아직 문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적어도 반세기는 더 유지될 것이라고들 한다. 로마제국이 쇠락하는 데도 천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더구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를 뽑은 것은 도전 극복을 위해 창조적인 해법을 찾아내는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아는 미국 사회의 능력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기존의 전망보다 몇 십 년은 더 글로벌 초강대국으로 남을 역량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양국간 협력이 국익에 부합 아직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우리로서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잘 살피고 그 흐름을 잘 탈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금융위기로 미국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세계질서의 재편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성급해보인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데 우리나라가 앞장서기에는 아직 결정적인 시기가 오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국제공조 과정에서도 가급적 미국과 협력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급적 기존의 질서를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장기적인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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