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술도 시장흐름 모르면 실패"
"기업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같습니다. 지나치게 빠르거나 늦으면 추락하게 마련입니다. 좌우 날개의 균형을 맞춰 꾸준히 날아야만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요즘 코스닥시장에서 잘 나가는 보안주의 간판주자로 꼽히는 아이디스의 김영달(35) 사장은 늘 자신의 경영철학을 '비행기론'으로 설명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와 벤처거품의 유혹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디지털비디오레코더(DVR) 업체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여기서 나온 셈이다.
툭하면 벤처기업의 비리가 터져나오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한 우물만 파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자랑스러운 벤처도 적지않다. 아이디스 역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인 기업 중의 하나다.
흔히 DVR 하면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겠지만, 은행 같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폐쇄회로(CCTV)를 떠올리면 된다. 과거 감시장비로 활용되던 CCTV를 밀어내고 요즘에는 컴퓨터를 통한 DVR가 새로운 보안장비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의 DVR 제품은 이 같은 신시장을 발굴해 세계시장을 석권할 정도로 기술력이나 마케팅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아이디스는 현재 국내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며 리딩컴퍼니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최고 수준의 보안을 요구하는 미 항공우주국(NASA)을 비롯해 신한ㆍ국민은행과 현대증권 등 국내 대부분의 금융기관에서도 아이디스 제품을 채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니버설스튜디오, 중국의 푸둥공항ㆍ상하이공항, 인천공항, 시드니 올림픽경기장 등에서도 곳곳에 아이디스 브랜드이 DVR가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에 만 5년의 짧은 업력의 회사를 이끌며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게 된 비결을 묻는 질문에 김 사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첨단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일수록 한 가지 기술로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망치(기술) 하나만으로 모든 걸 해낼 수는 없습니다. 시장을 알고 시장 중심의 마인드로 기술을 개발해야 합니다. 보안시장이 비디오테이프에서 디지털기록방식으로 재편되는 타이밍을 노렸던 것이 적중했습니다."
지난해 매출은 161억원. 절대금액은 많지 않지만 전년에 비해 두 배나 성장한 것이다.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400억원을 넘어 2004년에는 1,000억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DVR가 주목받는 이유도 성장잠재력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한국기술이 세계 최고이자 시장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고 코스닥기업의 CEO 중 흔하지 않게 박사학위를 보유한 김 사장은 "창업에 나선 동기는 바로 무식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엔지니어 출신의 박사과정 학생이 IMF 위기가 고조되던 지난 97년 말 5,000만원으로 창업의 길로 뛰어든 것은 누가 봐도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저지른 행동처럼 보였을 법하다.
"처음에 '시큐리티(보안) 사업'을 한다고 했을 때 교수님들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고 반대도 심했습니다."그러나 김 사장이 벤처에 뛰어들고 DVR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뮬레이션(실험)과 오랜 연구를 통해 얻어낸 확신의 바탕에서 시작한 것이다.
김 사장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영감을 얻어 험난한 벤처기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9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 견문을 넓히고 오라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미국의 실리콘밸리로 발길을 옮겼다.
당시 미국에는 벤처열풍이 뜨겁게 불고 있었다. "그 당시 실리콘밸리에는 벤처열풍이 한창이었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연구원들이 모여 앉아 사업 아이템을 놓고 토론을 벌였고 미국의 벤처캐피털들은 투자할 아이템을 찾고 있었습니다. 미국식 벤처를 봤을 때 '나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을 선정하고 제품을 만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템 선정과 개발에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첫 제품을 파는 데 또다시 1년 반의 시간이 필요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발은 현실에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시장을 알고 기술을 알고, 충분한 사전조사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신을 갖고 출발해야 합니다."김 사장은 학교에서 첨단기술을 공부하며 벤처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리 훌륭한 기술력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시장에서 필요 없는 제품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충분한 사전준비와 노력을 갖추지 못하면 성공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직접 확인시켜준 것이다.
김 사장은 곧잘 기업을 사람에 비유하곤 한다. 아이디스는 지난해 코스닥 등록이라는 성인식을 통해 자유를 갖고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됐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 아이를 키운 아버지로서 벤처기업이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벤처기업은 세 단계를 거친다고 봅니다. 첫번째는 잘 팔리는 제품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연구개발(R&D) 단계입니다.
잘 팔릴 상품을 만들어야지요. 그 다음은 제품을 파는 마케팅이 중요합니다. 거기까지 성공한다면 마지막으로는 직원들을 관리하고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매니지먼트(경영)가 중요하게 됩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주민등록등본 떼는 것 외에는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던 김 사장은 내후년이면 매출 1,000억원이 넘는 번듯한 중소기업의 대표가 된다. 하지만 순간순간 경영에 적지않은 어려움도 따랐다.
"살아오면서, 그리고 경영을 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힘에 부친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사가 더 커지고 경영에 부족함을 느껴 전문경영인을 영입해야 한다고 판단이 서면 미련없이 경영권을 넘겨줄 준비가 돼 있습니다."
1.9 김 사장은 아이디스의 지분 21%, 시가로 따지면 500억원 가량을 소유한 대주주이지만 한번도 회사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단지 비행기가 날아가는 데 기장 한명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대표이사 리더'를 맡았을 뿐이라고 소박하게 웃는다.
우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