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근본적으로 경제정책 결정행위는 정치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적 도구가 대의 민주주의라면 정당과 정부가 내리는 정책결정은 그 자체로 정치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정책 결정이 순수한 경제논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허구에 가깝다. 경제논리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더욱 그렇다.영국의회 사상 가장 유명한 「적과의 동침」이라 할 수 있는 곡물조례 폐지 동의안 사건은 정책결정이라는 정치행위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1846년 보수당인 토리당 출신의 로버트 필 총리는 자유당인 휘그당의 곡물 폐지 주장을 받아들이고 영광스러운 정치 은퇴를 선언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 근로자가 늘어나던 당시 구황식물인 감자의 흉작으로 수십만명의 아사자가 나오자 필 총리는 싼값 외국산 밀을 수입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그는 토리당의 지지기반인 지주계급을 「배신」하고 30여년간 계속되어온 곡물법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최근 정부의 각종 정책결정 과정이 석연치 않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고급 아파트의 취득세 인상 백지화다. 당초 재경부가 50평 이상, 5억원 이상의 고급 아파트에 대해 실거래 가격으로 양도세를 부과하려던 방침이 당정협의 과정에서 6억원 이상으로 완화되더니 12일 국무회의에서는 「중산층 세부담 증가」라는 핑계로 아예 철회됐다.
6억원 이상의 아파트 소유주를 단순히 중산층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사회통념상의 이견은 차치하고라도 정권내의 정책입안에 대한 불협화음과 일관성 상실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욱이 과거 선거 때마다 경제부처와 집권당이 내놓은 재정정책을 되새겨 볼때 정권교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변화가 무색하게 느껴진다.
지난 8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경제기획원은 재정투융자 특별회계라는 「괴물」을 내놓아 집권당이 갖가지 선심성 예산을 활용한 선거전을 치르게 했고 91년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는 전 세계에서 일본만이 채택하고 있는 지방양여금 제도를 도입,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첫 선거를 어지럽게 했다. 특히 우리가 채택한 지방양여금 제도는 자체 수익사업을 중시하는 일본의 제도와 달리 중앙정부의 일반예산을 지방자치단체에 나눠주는 기형화한 모습으로 지자체의 재정자립도 제고 의지를 약화시키는 역할만 했다.
이어 92년 대선때 집권 민자당은 정부가 당초 마련했던 과세특례 제도 폐지와 목적세인 교통세 신설이라는 조세개혁을 외면했다. 각각 자영업자와 지방 유권자를 의식한 조치였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변형된 이같은 편법은 두고두고 심각한 재정정책의 왜곡현상을 초래했다. 요즈음 슬그머니 머리를 들고 있는 부가가치세 과세특례 제도 폐지 재검토 분위기를 바라보면서 조세개혁의 험난한 길은 다음 정권에나 가서야 극복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다음으로 엿가락처럼 마냥 늦추어지는 투신사 구조조정 문제도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뒤늦게나마 13일 이기호(李起浩) 청와대 경제수석이 오는 11월6일까지 대우그룹 워크아웃 계획과 투신사 구조조정 방안을 매듭짓겠다고 밝혔지만 국민들은 결국 부실 투신사의 퇴출 의지가 공염불로 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막대한 공적자금 투입이 불가피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채권시장 안정기금을 동원해 시중금리를 낮추는 게 미봉책에 지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의 목표는 정권창출이다. 정권창출과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의회 장악이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하지만 정책결정이 명백히 정치행위라면 국민과 국가라는 지향점이 뚜렷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코스트가 많이 드는 제도라고는 하지만 불분명하고 정권만을 노리는 정책의 후퇴와 혼선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열어가는 시대에 배신하는 정치작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金 仁 模 정보통신부장/IAKIA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