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개정의 요지는 외화환산대차계정의 신설. 환율급등으로 외화부채가 많은 기업들이 연말결산에서 거액의 외화평가손실을 낼 것으로 예상되자 이를 조정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용으로 처리해야 할 외화평가손실액이 외화환산차라는 자산계정에 자리잡아 평가손실이 큰 회사의 자산규모가 오히려 늘어났다. 이 조항 덕택에 많은 재벌계열사들이 그해 결산에서 적자를 벗어났다.외국투자가나 회계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준이 개정되는 과정에서 일부 경제단체의 로비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외국투자가들이 한국의 회계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같은 회계기준의 불투명성이다. 회계의 헌법과도 같은 기업회계기준이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입김에 휘둘려 제멋대로 개정되기 일쑤였다. 제정권을 가진 정부의 경제정책에 따라 기준이 쉽게 바뀌기도 했다. 자연히 신뢰성과 객관성·비교가능성 등 회계의 질적 수준이 떨어졌다.
이같은 연유로 경제개혁 추진과정에서 정부와 IMF는 민간 회계기준제정기구 설립과 국제기준에 부합된 회계기준의 개정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해 12월 개정된 기업회계기준은 상당 부분 국제회계기준에 맞추려 노력한 흔적을 보였다. 특히 문제가 됐던 외화환산손익을 모두 당기손실에 반영하고 자산재평가 특례조항을 삭제, 내년 말까지만 가능하도록 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투자주식의 지분법평가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우발채무 및 연말 이후에 발생하는 거래·사건도 주석으로 표시하도록 해 공시의 강도를 높였다.
물론 이것으로 회계의 투명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도 조정해야 할 항목들이 많다. 기업의 분사나 사업체 일부 매각 등 중단된 사업 부문에 대한 회계처리 및 공시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다. 두루넷과 같이 주식원주가 해외에 상장돼 있을 때 이 주식을 가진 회사들의 처리기준도 애매하다. 스톡옵션에 대한 비용처리에도 말들이 많다. 기업들이 해외차입을 하거나 외자유치를 할 때 국내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재무제표는 국제기준에 의해 재작성되는 게 현 실정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회계투명성을 위한 첫 단추는 무난하게 꿰었다는 게 회계전문가들의 평이다.
미국의 회계기준위원회(FASB)를 본따 만든 민간 회계기준제정기구인 회계연구원이 지난 9월1일 개원했다. 민간 회계기준제정기구는 IMF와의 합의사항이다. 이 기구를 설립하는 데 세계은행(IBRD)측에서 상당한 금액을 지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부가 가지고 있던 회계기준 제정권이 민간에 넘어간 것은 의미가 크다. 일단 회계기준의 개정과 제정이 정부의 자의적 정책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한 점이 그렇다. 이는 한국회계에 대한 투자자와 외국인들의 신뢰을 높이는 단초가 된다.
하지만 민간 회계기준제정기구가 만들어졌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이제는 이 기구의 독립성과 공정성이 확보돼야 한다. 돈을 댄 13개 단체의 목록을 보면 이 과제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증권거래소·금감원·전경련·대한상의·은행연합회·투신협회·기협중앙회·생명보험협회 등 이해가 상충할 수밖에 없는 단체들이 20억원을 출자한 것이다. 출자한 기관들에 불리한 기준을 만들려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한 상황이다.
회계연구원의 성패는 재정 독립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경우 출판 등 자체사업으로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요원한 얘기다. 회계연구원은 감사수수료에 0.1%를 징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회계법인들의 반발이 만만찮아 성사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기준제정권에 대한 금감원의 미련도 풀어야 할 숙제. 회계연구원이 제정한 회계기준에 대해 금감원은 거부권을 가지고 있다. 양측이 논란을 벌인 끝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를 국제기준에 어긋나거나 이해당사자의 이익에 크게 위배될 때로 한정했지만 금감원의 위세에 회계연구원이 제대로 버텨낼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회계연구원이 출범함으로써 관치회계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회계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의 여러 정책 중 회계기준의 생산과 형성을 담당하는 기본적 토양은 어느 정도 갖춰진 것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이 토양에 어떤 씨를 뿌리고 어떤 열매를 거두느냐는 것이다.
이장규기자(美공인회계사)JK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