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 회장] 5.풋복숭아에 대한 쓰린 기억

일자 여인숙에는 신아일보 제기동 보급소장이 함께 묵고 있었다. 나는 그의 권유로 보급소 총무일을 보게 됐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구독률이 낮고 수금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 사람 저 사람 운영권이 넘어가더니 몇 달 못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서적 외판이었다. 낯선 집,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월부 책을 파는 일은 그야말로 어렵기 짝이 없었다. 나는 회사에서는 매일 20원씩 주는 교통비를 아껴 하루를 살았다. 그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원유종이란 친구를 알게 됐다. 원유종은 자기네 집에서 하숙을 하면 어떠냐고 했다. 여인숙 숙박료의 절반이면 된다는 것이었다. 1968년 2월 원유종이 세 살고 있는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청계천의 끝, 천호대로로 들어가는 입구의 뚝방 옆에 있는 작고 허름한 기와집이었다. 내 방은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좁은데다가 화장실 바로 옆이어서 냄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원유종은 놀고 있었는데 내가 내는 약간의 하숙비가 그 집 수입의 전부였다. 나는 매일 외판을 위해 출근했지만 임시방편일 뿐 직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신문 구인난이나 사원모집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지만 취직은 되지 않았다. 한국 슬레이트에도 시험을 쳤는데 1차 필기시험은 합격, 2차 면접은 불합격이었다. 어느 날 김포공항 부근으로 갔을 때였다. 길가에서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풋복숭아를 팔고 있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따 먹던 생각이 났다. 몇 개를 사서 대충 먼지만 닦은 채 먹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프고 온몸이 달아오르더니 구토와 설사가 시작됐다. 몇 번이나 버스에서 내렸다 탔다를 거듭하면서 겨우 집에 도착한 나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졌다. 그 뒤 며칠 동안은 물 한 모금만 마셔도 토하고 복통과 설사가 계속됐다. 돈이 없어 병원은 엄두도 못 내고 친구 어머니가 사다 준 약을 두어 번 먹었을 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독한 식중독이었다. 얼마나 많이 토하고 설사를 했는지 몸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뱃속에서는 창자를 꼬는 듯한 아픔이 계속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몸을 한 번 뒤채면 이쪽 벽에 닿고 반대로 뒤채면 저쪽 벽에 닿았다. 사고무친한 서울에서 꼼짝 없이 혼자 앓아 누웠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 그냥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괜히 서울까지 와서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집에 그냥 있었다면 먹고 자는 걱정은커녕 이런 고생은 하지도 않을 텐데 싶자 갑자기 고향 생각이 사무치기도 했다. `서울은 내가 살 곳이 아니야. 내가 아프게 된 건 집으로 돌아가라는 운명의 계시야! 몸이 나으면 가야지. 집으로 갈 거야.` 그러다가 아픔이 좀 덜하면 `아니야!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빨리 나아 외판이든 뭐든 열심히 하는 거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폴레옹도 말했지.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그래, 나도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는 걸 보여 줘야지. 틀림없이 보여 줄 거야.`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자 나는 평상심을 되찾았다. 앓아 누운 동안 초등학교 교사인 원유종의 사촌 여동생이 자주 들러서 물수건을 갈아 주는 등 간병을 해 줬는데 그 때의 고마움은 지금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열흘쯤 되어 겨우 일어났더니 체중이 10kg이나 줄었다. 친구 어머니가 시장 생선가게에서 잘라 버린 생선 대가리와 꼬리를 주워다가 시래기와 함께 끓여 주어 먹었다. 열흘 동안 굶다시피 한 내 입에는 꿀맛이었다. 문 밖에 나서자 어지러워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눈이 부시고 아파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몸 상태로는 상당 기간의 휴식과 요양이 필요했지만 내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외판에 나섰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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