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5월5일 새벽2시. 황제의 입이 열렸다. ‘프랑스…군…선봉…조세핀….’ 나폴레옹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만약 정신이 보다 또렷하고 삶에 대한 애착이 더 남았더라면 최후의 언어에 ‘세금’이 추가됐을지도 모른다. 세금으로 융성하고 망했으니까.
영웅이라지만 30세짜리 청년을 제1통령의 자리에 앉힌 것은 재정난. 특별신분(성직자와 귀족)에 대한 과세와 반발로 야기된 프랑스 혁명으로 국가운영을 맡게 된 국민의회는 공평한 세제를 제시하면 세금이 잘 걷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세수부족을 메우기 위해 압수한 교회 재산을 기반으로 발행한 새 지폐 ‘아시냐’는 오히려 물가고만 부추겼다.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는 국가들이 프랑스를 넘보고 재정파탄까지 겹치자 대안으로 등장한 게 나폴레옹. 황제에 오르기까지 나폴레옹이 세제개혁에 몰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인두세와 소득세를 보류하는 대신 도입한 토지세와 면허세ㆍ사치세는 재정을 회복시켰다. 노동자ㆍ농부의 3일치 급료를 세수화하고 창문세 실시로 확충된 재정은 근대적 군대를 낳았다. 국민개병제를 도입하고 장비를 통일한 프랑스군은 최강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군사비 지출이 끝없이 늘어났다는 점. 75만명의 병력을 먹이고 입히며 무장시키는 데 돈이 딸리기 시작했다. 국고가 바닥나고 1억프랑이 넘던 나폴레옹의 개인금고도 수백만프랑으로 줄었다. 세금을 올리니 반발이 따랐다.
선택은 대륙봉쇄령. 영국을 고립시키는 한편 범유럽경제권 형성을 위한 대륙봉쇄령이 통하지 않자 나폴레옹은 군사비 조달의 원천을 정복지 수탈에서 찾았다. 혁명의 전파를 기대했던 유럽 지식인들은 ‘약탈경제’에 등을 돌렸다. 세수확보 없이 밀어붙인 재정확대가 나폴레옹의 몰락을 앞당긴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