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0월29일] 수에즈 위기


1956년 10월29일 오후3시30분, 텔아비브 공항. 공수부대를 가득 실은 수송기 16대가 날아올랐다. 같은 시각 기갑부대도 전차의 시동을 걸었다.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군을 목표로 삼은 이스라엘의 기습은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영국과 프랑스가 약속보다 닷새 늦게 참전했을 때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진격속도가 그만큼 빨랐다. 영국과 프랑스는 어떤 이유에서 이스라엘과 손을 잡았을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운하와 석유.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맞서 양국의 공동재산인 운하 운영권을 되찾고 원유의 안전 항행로를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이스라엘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영불 양군은 원했던 대로 수에즈 운하를 되찾았으나 배는 다닐 수 없었다. 이집트가 화물선 40여척을 입구에 가라앉혀 운하를 막은 탓이다. 정작 문제는 미국에서 터졌다. 군사행동을 반대하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재선을 위한 유세 중 영국이 끝내 전쟁을 일으키자 총리 관저에 전화를 걸어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마침 영국이 금융위기를 맞은 상황, 국제통화기금(IMF)의 돈줄을 움켜잡고 있던 미국은 자금줄을 막았다. 유엔에서도 미국은 소련과 손을 잡고 영국과 프랑스를 옥죄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도발국이자 패전국이라는 불명예 속에 수에즈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프랑스가 나토에서 탈퇴해 독자행보를 보인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다. 미국에서 석유비축이 추진된 것도 이때부터다. 유엔의 평화유지군도 당시에 처음 생겼다. 운하를 돌더라도 경제성이 있는 초대형 유조선도 각광 받기 시작했다. 위기가 흔해졌기 때문일까. 웬만한 충격은 위기로 들리지 않지만 연일 수에즈 위기급의 격랑을 맞고 있다. 유가 급등에 금융시장 불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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