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3월 1일] <1632> 바시의 학살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3월 1일] 바시의 학살 권홍우ㆍ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562년 3월1일, 프랑스 동북부 바시(Wassy). 위그노(Huguenotㆍ신교도) 500여명이 예배 드리던 곡물창고에 가톨릭 무장병 200여명이 들이닥쳤다. 창고는 바로 불길에 싸였다. 수백 명이 부상한 가운데 얼마나 죽었을까. 23명에서 80명까지 신ㆍ구교의 셈이 다르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도 양쪽의 견해가 엇갈린다. 신교 측은 강경파 가톨릭인 기즈 공작의 계획적 학살로 보는 반면 구교 측은 '소란을 진정시키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한 점은 '바시의 학살'로 이름 붙여진 이날의 사건이 프랑스 종교전쟁(위그노전쟁)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이다. 앙리 4세가 종교자유를 제한적으로 인정한 낭트칙령(1598년)을 발표하기 전까지 프랑스는 36년간 종교내전을 치렀다. 전쟁과 휴전을 8차례나 반복한 위그노전쟁 와중에 전투와 질병ㆍ기아로 죽은 사람이 최소 200만명. 400만명이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전체 인구가 1,700만명 남짓하던 시절, 심각한 인적 피해를 입고도 프랑스는 1685년 또 다시 낭트칙령을 폐지해 약 30만명의 위그노가 조국을 등졌다. 대부분 상공인과 지식인ㆍ기술자였던 이들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스위스의 시계산업과 금융업, 독일의 모직업과 무기산업, 남아공의 와인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위그노의 후손이 8명이다. 가장 덕 본 나라는 영국. 적극적인 위그노 인재 영입으로 학문과 산업ㆍ공학의 꽃을 피웠다. 종의 곡선으로 유명한 수학자 드무아브르, 통계학의 선구자 고셋, 천재 토목기사 브루넬 부자, 바잘게트 등이 위그노의 후손이다. 프랑스가 관용을 베풀었다면 18, 19세기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의 몫이었을지도 모른다. 종교적 편협은 시대를 불문하고 나라와 사회를 그르친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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