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십자각] 빨간펜과 검은펜

참여정부 실책 중 하나로 ‘까만 볼펜과 빨간 볼펜론(論)’이란 게 있다. 까만 볼펜으로 기안하고 움직여서 일을 ‘만들어내야 하는’ 유능한 인재들이 정작 빨간 볼펜을 들고 흠집을 찾아내 ‘줄만 치는’ 자리에 몰려 있다는 게 요지다. “언니, 예일대 선배 꽈서(꼬드겨서) 대우에서 1억 받아냈어.” 검찰이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에게서 압수한 휴대전화에서 문자메시지를 복구했다면서 지난달 28일 공개한 휴대폰 문자메시지 중 하나다. 신씨가 박문순 성곡미술관장 딸 김모씨에게 지난 2004년 초 보낸 문자메시지로 돼 있다. 3년 전 휴대폰 문자메시지까지 찾아낼 정도로 훌륭한 검찰의 수사 의지와 능력을 보여주는 성과겠지만 정보기술(IT)산업 리더들과 전문가들의 시선은 또 다르다. 어렵게 쌓아온 대한민국 IT산업의 근간을 해칠 수도 있는 ‘뜨악한’ 행동으로 보고 있다. 앞서 검찰은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개인 PC와 청와대 집무용 PC까지 모두 압수해 변-신 두 사람 간 사적으로 오갔던 연서(戀書)들까지 찾아내는 ‘위대한 성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가입돼 있는 e메일회사의 서버들도 모두 뒤졌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법치주의 확립은 선진국을 완성하고 유지하는 만고의 진리고, 검찰은 지금 그런 측면에서 최선의 결과물을 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시점에서 기업의 전쟁터인 시장(市場)으로 눈을 돌려보자. 경쟁이 국제 무대로 확대된 후 무한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는 말이 딱 맞다. 경제학 박사로 정보통신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지낸 이석채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이 사석에서 한 얘기가 떠오른다. “모든 것은 문제를 안고 있다. 완벽한 것은 없더라. 그래서 모든 것은 선택이라는 게 내가 경험해 도출해낸 나의 경제학 철학이다.” 변-신, 두 사람의 범죄 행위는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다만 모든 수사 과정에서 한국의 경제란 게 그처럼 어렵게 선택해 도출해낸 오묘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빨간 펜을 든 검찰도 자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누가 e메일이나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 IT기기를 과거와 같이 그렇게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겠느냐”는 IT산업 리더들의 우려도 한번쯤 새겨들을 만하다는 것이다. 빨간 펜을 든 법조인들의 통찰력 있는 ‘선택’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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