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 文 정부의 '정의' vs 청년들의 '공정'

최형욱 디지털미디어부장

'정의로운 결과' 초점 맞추다

'공정한 과정' 외면할 수도

'善한 의지'만 내세우지 말고

정책 속도조절·소통 노력을

최형욱 부장




대학 재학 때 에피소드다. 학과 모임이 끝나고 20명가량이 중국집에 모였다. 과 회장이 “자장면 아니면 짬뽕”하고 외쳤다. 숫자를 세어보니 한 명이 모자랐다. 그 순간 어느 여학생이 “난 볶음밥”하고 손을 들었다. 돌발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몇몇 머리 나쁜 남학생들의 얼굴에 어리벙벙한 표정이 스쳤다. 곧 여기저기서 “아이, 정말” “통일해” “더 비싸, 그냥 먹어”하는 지극히 무식한 불만들이 쏟아졌다. 그 여학생은 잔뜩 주눅이 든 채 “미안해. 자장면 먹을게”하고 답했다.


당시 집단주의 문화에 익숙했던 세대들에게 흔히 일어났던 해프닝이다. 군대·경찰·관료 등 권력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기업·학교 등 사회 전반에 상명하복의 전체주의 문화가 판을 쳤다.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이른바 민주화 운동 내에서도 대의를 위해 소의(小義), 즉 개인을 희생하는 일을 당연시했다.

이런 세대 문화에 찌들어 있는 것일까.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만들어지면서 몇몇 한국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빠진다고 했을 때 ‘조금 안 됐다’는 감정 외에 큰 저항감은 없었다. 단일팀 구성이 올바른 정치적 선택인지만 궁금했다. 의외였던 점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 몰표를 몰아준 2030세대의 거센 반발이었다.

한 취업준비생은 “정치적인 이유로 대표팀에서 탈락한 선수들의 눈물에 감정이입이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도 사회 진출의 길이 막막한 가운데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과 능력마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현실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청년들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 대통령의 취임사에 열광하는 세대이다. 현 정부가 내세우는 한반도 평화, 비정규직 해소, 학력 철폐, 지방분권, 집값 안정 등의 대의에도 공감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다르다. ‘정의로운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개인의 노력은 무시된 채 ‘평등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은 외면받고 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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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취준생이 크게 반발하는 게 단적인 사례다. 비정규직들이 단지 정권을 잘 만나 질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자신들은 시험 볼 기회마저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채용 때 지역 인재를 할당하는 정책도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로 대학 온 것이 죄냐”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블라인드 채용도 마찬가지다. 최저임금 인상 역시 당장은 좋겠지만 이러다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줄어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사실 기성세대는 고도성장기에 편승해 자산을 축적했으면서도 정규직 일자리를 줄이는 등 기득권의 철옹성을 쌓아왔다. 반대급부로 청년층은 입시·취업 등에서 능력을 키워 친구들을 밟아야만 하는 살벌한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이른바 능력주의는 과거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지금은 사회 전반의 행복감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가 한순간에 바뀌지 않을 바에야 이들에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은 생존의 마지막 보루이다. ‘정의로운 결과’가 언제 올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정한 과정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다. 이를 두고 2030세대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각자도생에 매몰돼 공동체적 가치나 대의를 외면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것은 정치적 무능에 다름 아니다.

이미 사회는 세대 갈등, 이주노동자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보수 대 진보’라는 진영 가치로 설득할 수 있는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평창 단일팀 파문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최대 약자는 좌파 진영의 전통적인 지지층인 노조가 아니라 취준생이나 자영업자 등이라는 사실을 현 정부가 되새겨봐야 한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좋더라도 현실을 앞서 나갈 수는 없다. ‘선(善)한 의지’를 내세워 윽박지를 게 아니라 최소한 정책의 속도 조절이나 세밀한 조합, 소통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choi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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