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포춘US 스페셜 리포트]움츠러드는 중산층 ¦ ②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사람들

THE SHRINKING MIDDLE CLASS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9년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테크토피아에 둥지를 튼 이동식 차량주택 주차장에 사는 사람들. BY MICHAL LEV-RAM


움벨리나 마르티네스 UMBELINA Martinez의 가족이 수십 년 전 멕시코 미초아칸 Michoacan에서 미국으로 처음 이주했을 때,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 레드우드 Redwood 시에 방 3개 딸린 집을 구했다. 하지만 그들만 사는 집은 아니었다. 25명이 그 주택에 살며, 화장실 하나를 공동으로 사용했다. 8명이나 되는 마르티네스 가족은 방 한 칸에서 비좁게 살아야 했다. 그녀는 “부모님이 방 밖으로 나가려면 우리들을 거의 밟고 가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아이 셋을 둔 46세의 이 싱글 맘은 지금은 좀 더 널찍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 팰로 앨토 Palo Alto 시 이동식 차량 주택 주차장 내에 있는 200제곱피트짜리 트레일러 하우스가 그녀의 보금자리다. 팰로 앨토 시는 IT산업의 중심지로, 미국 내에서 가장 생활비가 비싼 도시 중 한 곳이다. 그녀는 이 곳에서 13년을 살고 있다.

그녀는 부엌-거실 겸 식당 겸 창고로 쓴다-에 앉아 “누군들 팰로 앨토에서 살고 싶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부엌의 얇은 벽은 연초록색으로 칠해져있다. 벽면 한쪽에는 검은색 냉장고가 있고, 그 위에는 TV 모니터가 놓여 있다(비좁은 주거공간은 어느 정도 창조적인 디자인을 요구한다). 출입문과 거의 붙

움벨리나 마르티네스가 팰로 앨토의 부에나 비스타 이동식 주택 차량 주차장 내에 있는 집 부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팰로 앨토는 미국 내에서 주거비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한 곳이다.       사진=포춘US움벨리나 마르티네스가 팰로 앨토의 부에나 비스타 이동식 주택 차량 주차장 내에 있는 집 부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팰로 앨토는 미국 내에서 주거비가 가장 비싼 도시 중 한 곳이다. 사진=포춘US



어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는 키위와 오렌지들이 놓여있다.

마르티네스의 이웃들 대부분은 가족과 함께 방 2~3개짜리 이동주택에 거주한다.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운다. 그들의 트레일러 주택들은 색깔 별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일부는 꽃과 고추가 주렁주렁 열린 미니 정원도 갖추고 있다.

많은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이 거주하는 팰로 앨토가 트레일러 거주지로 적합하지 않는 곳으로 보인다면, 그건 실제 그렇기 때문이다. 부에나 비스타 모바일 홈 파크 Buena Vista Mobile Home Park는 도시의 가장 번잡한 거리 중 한 곳에 위치한 발레로 Valero 주유소 뒤쪽에 틀어 박혀 있다. 이 곳에는 불과 100여 개의 트레일러와 약 400명의 주민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마르티네스와 아이들, 그녀의 어머니와 남녀 형제들, 그리고 남자 형제 가족들의 보금자리도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그녀의 어머니는 마르티네스와 함께 산다. 남녀 형제들은 각각 다른 이동주택에서 거주한다).

이 곳 주민들은 대부분 근처 레스토랑과 미용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이주민 근로자들이다. 그들은 이 지역에서 집세와 공과금으로 한 달에 대략 1,400달러를 낸다. 반면 팰로 앨토의 주택 중위 가격은 320만 달러나 된다.

인근 포시즌스 호텔에서 연회 서비스 직원으로 근무하는 마르티네스는 “내 가족과 나 자신의 경우, 팰로 앨토 다른 지역에서 산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에나 비스타는 1920년대 길거리 잡화점과 모텔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팰로 앨토 저소득 거주민들의 마지막 보루가 됐다.

이곳 토지소유주들은 2012년 이동주택 주민들에게 부지를 아파트단지 개발업체에 매각할 것이라 통보한 바 있다. 그 계획은 쫓겨날 주민들에 대한 보상안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티네스의 이웃 로베르토 무노스 Roberto Munoz는 “난 돈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다만 딸이 이곳 학교를 계속 다니길 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마르티네스와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들은 팰로 앨토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아 뜻을 규합했다. 그러자 샌타 클래라 카운티 주택 당국이 지난 2017년 주민들이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4,000만 달러에 그 부지를 매입했다. 마르티네스의 여동생 마리아는 현재 부에나 비스타 주민대표를 맡고 있다.

마리아는 “다른 목소리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녀의 방 하나짜리 트레일러에서 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에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즈 Sun Microsystems 창업주의 4층짜리 대저택이 매물로 나와있다. 가격이 얼마냐고? 무려 9,680만 달러다.

-46%: 1979년부터 2015년까지의 중산층 소득 증가율. 중상위층(78%)과 빈곤층(79%)에 크게 떨어진다. 출처 브루킹스 연구소

-65%+: 2005년부터 2014년까지 25개 선진국에서 소득이 정체하거나 감소한 가구 비율. 출처 맥킨지 앤드 컴퍼니

▶공적 연금을 지키기 위한 그의 투쟁: 루이빌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매슈 카우프만(39)은 매우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나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나는 콘도와 여자친구가 있고, 연봉도 7만 달러 정도 된다. 우리는 가끔 글램핑도 한다. 그러나 불의에 맞서다 적이 되는 게 두려워 편안함에 안주한다면, 그건 진정한 안정이 아니다. 그래서 2018년 불의에 맞서 일어섰다.

켄터키 주지사가 단 하루 만에 부실한 연금 개혁안을 입법 처리했다. 그래서 120개 모든 카운티 교사들이 지난 4월 프랭크퍼트 Frankfort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 위해 병가를 냈다. 당시 모든 공립학교가 문을 닫았다. 주지사 반응은 우리가 그날 교사로서의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고 처음으로 약물에 손을 댔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깡패”라고 매도했다. 우리의 대응이 미숙했다고 비난을 하기도 했다.

그들 모두는 우리를 베이비시터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법에 따라 매해 자기계발을 하거나, 복수의 석사 학위를 필요로 하는 베이비시터를 본 적이 없다. 나는 내 직업을 지키면서, 교사로

루이빌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매슈 카우프만.                                    사진=포춘US루이빌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매슈 카우프만. 사진=포춘US


서의 책임도 다해야 한다. 그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교사들은 보통 25년 내에 은퇴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27년으로 늘었다. 그들이 골대를 옮겼기 때문이다. 나는 설령 손해가 있더라도 발전을 한다면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방해행위다. 우리는 그 동안 ’기회의 나라‘에서 살아왔다. 현재는 ’희망의 나라‘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그들이 항상 올리기만 하는 세금과 같은 것이 됐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완전히 벼랑 밑으로 추락하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용만 당하게 된다.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연금술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맞서 싸우는 기존 체제를 어떻게든 정상적인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소수가 권력을 독점한 ‘과두체제(oligarchy)’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나라의 많은 정치인들을 지켜봐왔다. 그들은 돈을 벌려면 어떻게 법을 이용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게 권력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개인 견해에선 시민들이 단지 기부자나 로비스트로만 존재한다. 이런 권력은 자유가 아니라, 정치적 지배로 미국을 규정한다.

나는 종종 그들이 나를 인간으로 여기는지 의심한다. 사람들은 단지 은행 잔고 때문에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돈으로 가늠할 수 없는 풍요가 존재한다. 그건 공동체와 문화, 지식, 경험, 참여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한 사람이나 국가를 단지 주식시장 같은 것으로만 판단한다면, 현실에서 느끼는 것보다 항상 더 가난한 삶을 살 것이다.

▶개인 견해: 니콜 애드킨스(이동식 주택 무료급식단체 상임이사 겸 설립자)

우리 지역에선 많은 일자리가 생겼다가 없어지곤 한다. 임금도 그 전만큼 높지 않다. 이 지역의 많은 공장들이 다른 곳에 외주를 주고 있다. 사업체들이 문을 닫으면 가족들이 구직활동을 벌인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도 과거에 비해 보수가 열악하다.

사람들은 매월 각종 공과금을 낼 수 있는지, 혹은 가족들을 위해 식품을 살 수 있을지 파악해야 한다. 대다수 노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일을 더 많이 할수록, 오히려 발전하기 위한 노력이 벌을 받는 상황이다.

우리는 정부의 식품 보조를 받던 가족들이 갑자기 더 벼랑 끝으로 몰리는 걸 목격하곤 한다. 현재 그들은 가족이 먹을 음식을 얻기 위해 급식소로 올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부업하며 버티기

래릴루 카룸바 Larrilou Carumba는 6년 이상 쉬지 않고 럭셔리 호텔 샌프란시스코 매리엇 마키에서 방 청소를 해왔다. 해마다 베이 에어리어의 다양한 기술 컨퍼런스에 몰려드는 수 천명의 회사 중역들이 이 호텔을 숙소로 사용한다. 필리핀 출신의 싱글맘 카룸바는 이 곳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녀는 몇 가지 부업도 한다. 그래도 아이들 부양하기가 빠듯하다. 아이들은 학교의 무료 급식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있다.

카룸바는 호텔 객실 정리 외에도 세탁소 일을 하며 팁을 받아 왔다. 최근에는 도어대시 DoorDash에서 음식 배달 일도 시작했다. 부업으로 버는 돈은 그녀의 네 가족을 부양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래릴루 카룸바가 샌프란시스코 매리엇 마키 호텔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포춘US래릴루 카룸바가 샌프란시스코 매리엇 마키 호텔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포춘US


이들은 오클랜드 외곽 샌 린드로 San Leandro에 있는 그녀 여동생 집의 비좁은 침실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가족이 침실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쫓겨난 후, 그녀는 여동생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집주인이 리노베이션을 한 후 집세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주비가 비싼 이 도시에선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카룸바는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는 한 주 70시간을 일했다”고 말했다. 현재 그녀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호텔에서 몇 시간 방 정리를 하고, 일에 지쳐 잠을 청한 후 다시 일어나 세탁소로 향한다. 아이들 때문에 자주 깨는 바람에 밤일을 빠뜨린 적이 없다. 그녀는 “하루 종일 일만 하기 때문에 너무 지쳤다”며 “아이들을 볼 시간조차 없을 정도다. 더 이상 내 삶은 없다. 나 자신을 돌본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카룸바가 아이들과 유일하게 보내는 소중한 시간은 도어대시 배달에 아이들이 동행해줄 때 뿐이다.

물론 희망은 있다. 노조 리더인 카룸바는 최근 매리엇 호텔 직원들이 임금인상 등 새 단체협약을 맺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조만간 일과 후 부업 한 가지 정도는 그만둘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분열된 미국: 사전적 정의

-중산층: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계급이다. 하지만 중산층은 2015년에 경제적 다수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이 용어는 18세기 귀족이나 농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계층을 정의하기 위해 처음 사용됐다.


-아메리칸 드림: 이 구체적 용어는 1931년 역사학자 제임스 트루슬로 애덤스 James Truslow Adams에 의해 널리 퍼졌지만, 신대륙에서의 기회(종종 실력을 통해 얻는다) 개념은 미국 건국 자체보다 앞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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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빈곤층: 미국 노동통계청에 따르면, 이 계층-2015년 기준으로 미국인 860만 명이 이 계층에 해당한다-은 연중 최소 6개월을 일한다. 하지만 빈곤선에 해당하는 소득조차 올리지 못한다.

-사회 안전망: 개인들이 극단적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구축된 미국 사회안전망은 고용주들의 지원(복지)과 정부 보조(사회보장제도, 메디케어, 식품지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개인 견해: 저넬 크리스텐슨(유타 주 오렘 가족 지원 및 치료센터 상임이사)

지원 프로그램을 둘러싼 오명이 하나 있다. 우리가 아이들과 부모에게 제공하는 상담 프로그램의 상당수는 정부 기금과 민간 재단 등의 보조를 받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스템을 악용하는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가족들은 대부분 어렵게 도움을 요청한다. 부모들은 인맥이나 자원이 부족해서, 가족들을 돌보지 못해서 실패자가 됐다고 느낀다.

우리와 그들을 따로 구분해선 안 된다. 단순한 자선이 돼서도 안 된다. 그들을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야 한다. 사회 차원에서 소외계층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일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부업하며 버티기

내 이름은 디오 굴리 Dio Gourley다. 나는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로, 미시시피 해안가에서 남성으로서의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 현재는 월마트에서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주당 23~35시간을 일하며 시급 11달러를 받는다. 스케줄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부업은 할 수 없다. 내가 며칠간 휴가를 낸다면, 그건 그저 시간을 허송하는 일일 것이다.

월마트는 가장 가난한 주에 있는 이 동네에서 가장 급여가 좋은 일터다. 우리가 만약 파업을 한다면, 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를 해고할 것이다. 회사에서 잘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선 단체행동을 벌일 수 없다. 나는 출근할 때 고모할머니(great-aunt)의 차를 얻어 타고 있다. 한번에 일정 기간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때가 되면, 60달러가 안 되는 돈으로 2주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 돈이 조금 있어 집에서 음식을 싸오지 않을 경우엔 회사 바로 건너편 와플 하우스에서 식사를 한다.

나는 음식값의 15% 이상을 팁으로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트리플 해시 브라운즈/*역주: 다진 감자와 양파를 섞어 노릇하게 지진 요리/와 커피만 주문하면 크게 돈이 들지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나보다 더 돈이 필요하다. 우리 가족 모두는 정말 열심히 산다. 어머니는 나를 퇴근시키기 위해 밤 11시까지 깨어 있다. 그러고도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출근을 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닥치기 전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연안에서 근무했고 어머니는 주택에 페인트칠을 했다.

당시 우리는 4년째 할머니, 고모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후에는 트레일러에서 거주했다. 아버지는 결국 알코올 금단 증상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이 폐렴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어머니까지 실직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정부 지원으로 파산을 겨우 면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물위에 간신히 떠 있는 정도였다. 매달 청구되는 고지서 중 급한 것부터 납부하면서 근근이 버텨냈다.

지금 나는 다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전에는 잠깐 남자친구, 룸메이트와 함께 지낸 적도 있었다. 우리는 솔직히 성관계는 갖지 않았다. 돈은 내가 집으로 돌아온 이유 중 하나다. 여자형제 2명 모두도 종종 집으로 돌아와 살곤 했다. 아이를 돌봐주면서 번 돈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내 조카들을 먹이기 위해 나는 무언가를 충분히 먹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은 항상 똑같았다. 매일 굵게 빻은 옥수수와 싸구려 음식, 엄청난 양의 달콤한 홍차가 전부였다. 마치 일을 하는데 필요한 혈당을 높이기 위한 음식 같았다.

돈이 부족할 땐 주머니에 고지서들을 넣고, 무작위로 1~2개를 뽑곤 했다. 현재 내 계획은 이사를 가는 게 아니다. 내집 바로 옆에 어머니가 사실 이동주택을 하나 더 짓는 것이다. 그래야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서로를 돌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집세와 담보대출 이자도 줄일 수 있다.

만약 ’아메리칸 드림‘이 있다면, 그건 정말 악몽일 것이다. 현상 유지를 하려면 투잡을 뛰어야 하고, 형편이 더 좋아지려면 3가지 일은 해야 한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한 돈 400달러를 넉넉히 저축하면서 각종 공과금을 납부할 수 없는 친구들도 많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도록 일을 시키고, 호화 요트를 3~4개씩이나 구입한다. 이게 과연 아메리칸 드림인가?

-22: 1938년 첫 시행 후부터 지금까지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한 횟수. 현행 7.25달러는 지난 2009년 고시한 금액이다.

-1968: 정부의 최저임금 실제 가치가 가장 높았던 해. 현재 달러 가치로 거의 연 2만 달러에 달했다. 현재는 약 1만 5,000달러 수준이다. (출처: 옥스팸 아메리카)



▶개인 견해: 보 G. 헤이엔(미주리 주 캔자스시티 급식단체 회장 겸 CEO)

박스 하나에 가난한 사람들을 집어 넣고, 다른 박스에는 부자들을 넣는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크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중산층이라는 가운데 박스에 들어가길 원한다. 우리는 마치 중산층이라는 계급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장하길 바란다.

빈곤은 사람들이 충분히 갖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우리는 단순한 저임금 이상에 대해 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란 딱지를 붙인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오히려 해를 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대표 프로그램 ’캔자스시티 공동체 부엌(Kansas City Community Kitchen)‘을 통해 주 5일간 아침과 점심을 무료 제공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다음 식사를 어디서 해결할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도입됐다. 우리는 단지 ’끼니해결 불안‘이라는 문제에서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보고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에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일과 삶의 균형? 꿈 같은 얘기: 간병인 메리 루 앤젤 Mary Lou Angel의 제1 고객은 올해 92세인 어머니 로이스다.

나는 원래 메리 루 미용실이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종업원도 세 명이나 됐다! 그 땐 꿈 같은 시절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 괜찮아, 하루 혹은 한 주가 힘들어도 언젠가 은퇴를 해서 크루즈 여행을 할거야’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나는 62세에 어머니 돌보는 일 때문에 일찍 일을 그만둬야 했다. 처음 3년이 특히 힘들었다. 사회보장 혜택을 받으려면 65세까지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렵게 버텨냈다. 지금 크루즈 여행은 언감생심이다. 앞으로 영원히 어려울 것 같다. 내겐 얼마 전 갔던 모로 베이 Morro Bay 당일치기 여행이 가장 좋은 때였다.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많은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어머니는 현재 92세다. 그녀는 예전에 토마토나 목화를 따는 밭 일을 하셨다. 글은 읽지 못한다. 그녀는 단 한번도 60세나 70세를 넘어 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92세의

로이스 카바할(왼쪽)이 프레스노 집에서 딸 메리 루 앤젤과 함께 있다.               사진=포춘US로이스 카바할(왼쪽)이 프레스노 집에서 딸 메리 루 앤젤과 함께 있다. 사진=포춘US


나이에도 보청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당뇨를 앓고 있으며, 매월 받는 928달러 보조금 중 약 300달러가 약값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어머니 간병 대가로 메디케이드 Medicaid로부터 시급 11달러를 받고 있다. 이런저런 세금을 떼면 2주에 한번씩 약 400달러를 받는다. 우리는 현재 시급 15달러씩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틀에 한번 그녀 아파트로 건너간다. 우리는 현재 따로 산다. 하지만 ‘함께 하는 각자의 생활(alone together)’에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모순되는 이 말이 성립한다면 말이다. 나는 그녀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그 요리를 먹여주고, 목욕도 시켜줄 것이다. 아마 우리는 존 웨인이 카우보이로 등장하는 옛날 서부영화도 함께 볼 것이다.

어머니가 몇 달 전 경미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다. 나는 그녀가 돌아가실 것이라 생각했다. 순간 나는 내 삶이 훌쩍 흘러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재 내 나이는 일흔 둘이지만 마치 90처럼 느끼며 산다. 나는 99센트 매장을 매우 감사히 여기고 있다.

나는 신이 우리 모두를 있는 그대로 맞아주는 교회를 다니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새 옷을 사지 않는다. 내가 기껏해야 돈을 맘껏 쓰는 거라곤 어머니 화장품을 사는 것 뿐이다. 바로 핑크색 립스틱이다. 나는 솔직히 어떤 종류의 핑크인지 잘 알지 못한다. 매장들에 너무나 많은 화려한 핑크색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99센트 매장에는 오래된 단순한 핑크색만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와 내가 그 립스틱을 바르면 50대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그 정도면 만족한다. 달리 선택할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충분하다.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지보단 누군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몰락하는 계급’의 수학적 고찰

미국 중산층의 이상적인 모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형성돼왔다. 거의 30년간 꾸준히 경제가 성장하고 임금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경제와 임금 모두 성장하는 모델은 1970년대 갑자기 해체됐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1973년부터 2017년까지 경제 생산성은 77%나 증가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평균 보수는 12.4% 상승에 머물렀다.

이런 불일치는 ‘경제적 중력’의 변화와 괘를 같이 한다.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와 ‘지식산업’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로 인해 노동조합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노조는 많은 직업 군에서 일반 근로자들이 좀 더 많은 파이를 쟁취하는데 일조해왔다. 임금 소득보다 투자와 부동산 소득에 훨씬 더 유리한 세제 개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자본을 소유한 계급이 엄청난 우위를 누리는 경제 질서가 탄생했다. 그리고 자본 계급에 진입하는 비용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 계급에서 탈락하는 대가 또한 마찬가지다.

-승자독식 경제: 투자자와 부동산 소유주들을 위한 세제혜택은 부(富)가 상위 10%에 집중되는데 일조했다. 소득에 미치는 고등교육의 영향 증대 또한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 1995년 이후, 대졸 이상자의 평균 소득은 28%나 늘었다. 반면 고졸자 평균 소득은 5% 증가에 그쳤다.

-이상한 글로벌 기업: 미국 소득 계층 중 중하위 90%는 대부분 산업국가 국민들보다 적은 돈을 집에 가져간다. 심지어 중국처럼 사회가 훨씬 더 경직된 국가들에도 뒤처진다.

-점점 감소하는 구매력과 저축: 소득은 집세와 의료비, 혹은 학비-미국 일반 가정의 3대 부담이다-만큼 빠르게 증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저축률이 감소했고, 중산층은 긴급상황이나 실직으로 인한 파산에 더욱 취약해졌다. 은퇴 후 생활이나 자녀들을 위한 저축 여력도 줄어들었다.

-갈수록 빡빡해지는 도시생활: 정보 혁명은 특정 미국 도시들에 대한 일자리 집중을 심화시켰다. 특히 경쟁력을 갖춘 일부 인기 해안 도시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로 인해 중산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집값이 급등했다. 주택 구입이나 다른 재정적 목표를 위해 저금을 하는 것이 더욱 힘들어졌다(지난해 11월 기준 미국 내 시급 중간 값은 27.35달러였다. 중서부와 남부 대부분 도시는 그 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정재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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