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금융정책

[여명] 다시 떠올린 이헌재의 '386세대 경제무지론'

김홍길 금융부장

금융을 육성해야할 산업이 아닌

동원 가능한 '수단'으로 여기면

시장개입 유혹에 쉽게 빠져들어

과거 흑백논리식 접근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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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초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을 2주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에도 LG카드 부실사태로 카드사에 대규모 유동성이 지원되고, 중국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공포가 겹쳐 내수가 망가져 갔다. 정부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5%대에서 4%대로 내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경기부양을 공식 언급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0월 보유세 강화를 핵심으로 한 10·29부동산대책이 발표됐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한풀 꺾이는 상황에 서민들의 세금을 더 올려버리는 ‘거꾸로 가는’ 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1년 만에 경제부총리가 교체됐고 2004년 2월 구원투수로 이헌재 부총리가 등판했다.

하지만 노련한 그도 청와대·여당 참모그룹이던 ‘386운동권’과 갈등이 잦았다. 참다못한 이 부총리는 ‘386세대 경제무지론’을 꺼냈고, 얼마 안 있어 물러났다. 요즘 말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옴)’로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는데 이 부총리의 발언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위기 해결사’였던 이 부총리는 카드사태로 동요하던 시장을 진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놓고도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이 부총리가 물러나는 과정을 지켜본 관료들은 386운동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갖게 됐다. ‘자기(386)들이 필요할 때는 (부총리로) 오라 했다가 어느 정도 (시장이) 진정되니까 버려졌다’는 의심이 지금도 관가를 휘감고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 관료 출신의 한 인사가 주요부처 장관 하마평에 올랐지만, 따르던 후배들이 ‘이헌재 케이스’를 예로 들면서 “가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소득주도 성장 등의 거시정책은 차치하고 금융시장에 대한 미시정책만 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소동이 대표적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반발하는 자영업자를 달래기 위해 가맹점 수수료 정책을 돌려막기로 썼지만, 정작 혜택을 받은 것은 영세자영업자가 아니라 동네 마트를 여러 개 운영하는 연간 매출 500억원의 대형마트 사장들이었다. 이들은 수수료 인하 결정 직후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대통령님 감사합니다’라고 쓴 푯말을 들고 고마움을 표시해 눈길을 끌었다. 정책의 모순이 여실히 드러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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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겉으로는 과도한 마케팅비를 줄이기 위한 차원이라고 말하지만, 속내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자영업자의 불만을 달래라는 정치권의 주문에 굴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금융이 육성해야 할 산업이 아니라 동원 가능한 ‘정책수단’에 불과하다는 인식 없이는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다. 가계대출 총량규제나 대출금리에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는 것도 여사로 볼 일이 아니다. 1,500조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를 생각하면 거시적인 관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인지 몰라도 시장을 왜곡하는 투박한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 최근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도 “(정치권이나 여론 등의) 근거 없는 시장개입 요구는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는 뼈 있는 이임사를 남겼다. 은행이 이익을 내면 ‘돈놀이(예대마진)’로 손쉽게 돈을 번다고 비판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돈을 못 벌면 외국인 투자가들이 등을 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한계가계나 한계기업이 부실해져 실물경제로 전이될 때 은행이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경제에 무지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15년 전의 386운동권이 이제는 단순히 대통령 참모 수준을 벗어나 동업자가 됐다. 최근 만난 한 인사는 “(노무현 정부) 당시 386들은 참모(청와대 행정관) 수준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과 ‘동업자’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네트워크를 가졌다”고 말했다. 지금의 386세대가 과거식의 흑백논리에 갇혀 있으면 현안을 제대로 못 보거나 감동적인 대책을 내놓기 어렵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386세대의 역할이 수명을 다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상황에서, 과거 이헌재 전 부총리가 물러나며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민주화에 헌신했던 386세대의 열정을 3만달러 시대를 여는 경제 도약에 바쳐달라.”
what@sedaily.com

김홍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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