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박훈의 일본사 이야기]도쿄 앞바다 나타난 증기선의 충격...200년 日 쇄국을 끝내다

<1853년 페리함대의 출현>

美 페리제독 함대 4척 이끌고

日 에도만에 등장해 수교 요구

연기 뿜고 질주하는 함대 위용

해군·증기선 없던 일본사회 경악

270년 도쿠가와 막부 종언 불러




한국인만큼 일본에 신경 쓰는 사람들도 없지만 그만큼 상대를 잘 알고 있느냐 하면 머뭇거리게 된다. 특히 일본사는 더더욱 낯설다. 그러나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도, 잘 사귀기 위해서도 그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20여년 전 일본유학을 간다고 하니 집안 어른들이 “하필이면 왜놈 역사냐”라고 하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 이런 자세는 벗어날 때가 됐다. 배척이나 외면만으로는 좋은 경쟁도, 효과적인 대응도 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국익의 증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부터의 일본 근대사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대체로 우리의 구한말에 해당하는 시기다. 아마도 한국 수천 년 역사상 가장 지리멸렬했던 시기일 것이다. 최근 일부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이 시기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 사회의 대응을 나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면 역사상 비판할 수 있는 시기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일본 침략은 그것대로 규탄하더라도 이 시기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둬서는 안 될 것이다.


거꾸로 같은 시기 일본은 수천 년 역사상 기억에 남을 만한 대응을 보였다. 한 서양인은 이를 두고 ‘죽음의 도약’이라고까지 불렀다. 이 양국 대응의 차이가 조선의 식민지화로 이어졌다. 이런 정도의 극단적인 격차가 나지 않았다면 감히 일본이 자기의 3분의2나 되는 규모의 옆 나라를 병합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후유증이 어떠한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근대일본을 규탄만 해서는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머리는 여전히 무겁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맨 끝에 고립돼 있던 저 섬나라가 어떻게 그런 도약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는 동안 구한말의 한국인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20세기 후반 한국의 도약은 저것과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또 다른가. 현재 해방 후 처음으로 찾아온 고차방정식의 국제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규탄을 넘어 냉정한 시선으로 근대일본을 직시한다면 우리 생각의 폭과 깊이는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그것이 결국 우리 사회와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연재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 이웃 나라가 겪어왔던 장대한 파노라마를 추적해보자. 그리고 그 거울에 우리를, 가차 없이 비춰보자.

미국 해군 증기선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리 제독.미국 해군 증기선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리 제독.


‘페리함대의 출현’

1853년 7월,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제독의 함대가 에도만(현 도쿄만)에 ‘돌연’ 나타났다. 그 모습은 에도만 해안가에서 일반 백성들도 볼 수 있었다(서울과 달리 도쿄는 항구도시다). 검은 선체가 뿜어내는 연기는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줬다. 흑선(黑船), 즉 말로만 듣던 증기선이었다. 페리는 미국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의 국서를 들이밀며 수교할 것을 요구했다. 막부 역인(役人·관리)들은 당황했고 에도 시민들은 술렁거렸다. 당시 에도는 인구 100만의 세계 최대도시. 밀집된 시민들 사이로 이 소식은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17세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있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다. 그는 저 멀리 도사번(土佐藩: 번은 봉건국가) 출신이었지만 검술 수련을 위해 에도에 유학 와 있었다. 이 명민한 청년에게 흑선의 충격은 강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나는 것이었다. 도사번의 경비 병력으로 동원되자 진짜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흥분해서 고향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이 나면 외국 놈들의 목을 따서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1853년 9월23일 편지)”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막부 역인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막부는 이미 1년 전부터 미국함대가 국교수립을 요구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페리라는 제독 이름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에 주재하던 네덜란드인들이 제공한 정보였다. 어떤 면에서 페리는 ‘돌연’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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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캘리포니아를 영토로 확보했는데 1848년 거기서 금맥이 터졌다(골드러시). 사람과 자본이 모여들자 자연히 태평양과 그 너머에 대한 관심도 증가했다. 아편전쟁 후 미국은 이미 중국과 조약(왕샤조약·1844년)을 맺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서양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무역하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당시 선박의 수준으로 중국까지 직접 가기에 태평양은 너무 넓었다. 중간에 석탄과 그 밖에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받을 기항지가 절실했다. 일본은 그에 적합한 곳이었다.

페리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었다. 특히 증기선으로 미국 해군을 강력하게 만들어 ‘증기선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나이 이미 59세로 은퇴한 상태였다. 59세면 당시로는 노인 축에 든다. 이미 충분한 명예와 부를 갖고 있었으니, 가족에 둘러싸여 여생을 즐기면 그만이었다. 실제 그럴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부름에 응했다. 역시 큰일을 할 사람은 용기와 에너지가 넘친다(다만 페리는 일본행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지 3년 만에 죽었다. 역시 노년에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페리함대는 증기선 2척, 범선 2척의 규모였다. 이듬해 재차 에도만을 방문했을 때 그 규모는 더 커졌다. 페리함대의 규모는 막부에게 충분히 위협을 가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해군이 없었다. 사무라이는 어디까지나 육지의 전사다. 반면에 서양 국가들은 증기선의 발명으로 바다를 제집 드나들 듯 했다. 수많은 병사와 무기를 실은 거대한 배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풍향과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바다를 질주하는 걸 보고, 일본인들은 경악했다. 막부는 에도 시민들에게 동요하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에도 시중에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태평스런 잠을 깨우는 죠키센(上喜撰: 당시 유명한 고급 차인데 증기선(蒸氣船)과 일본어 발음이 같다), 겨우 4잔 마셨을 뿐인데 밤에 잠을 못 자네.” 4척의 페리함대에 놀라 허둥대는 막부를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미국 페리함대의 증기선.미국 페리함대의 증기선.




‘당시 일본은 어떤 나라였나’

페리함대가 일본의 문을 두드렸을 때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이미 270년간 통치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 100년간의 전국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들을 누르고 1603년 도쿠가와 막부(에도 막부)를 세웠다. 막부 통제 하에 전국에는 270개 정도의 봉건국가인 번(藩)이 있었다. 이 번들은 그 규모에서 서로 차이가 많았다. 메이지유신에서 막부를 타도하는 사쓰마번, 죠슈번,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의 도사번은 큰 축에 드는 번들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이들은 전투태세를 풀지 않았다. 막부도, 번도 전투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영지 통치를 했다. 말하자면 군정이다. 그 후 270년간 전쟁이 없는 장기평화가 지속됐는데 놀랍게도 이 체제는 그대로 유지됐다. 지배층은 여전히 사무라이였고 그들은 1870년 메이지 정부가 폐도령을 내릴 때까지 칼을 차고 거리를 활보했다. 이래서 학자들은 도쿠가와 사회를 ‘병영국가’라고 부르는데, 이 점이 아마도 조선사회와 가장 다른 점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719년 통신사로 일본에 간 신유한은 이렇게 말했다. “길가에서 통신사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길가에 앉아 있는데…질서정연하게 모여서 엄숙한 분위기라 떠드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한 인파가 수천 리 길에 이르렀는데 단 한 명도 제멋대로 행동하여 행렬을 방해한 사람이 없었다.…다스리는 법이 모두 군사제도에서 나왔으므로 백성들이 보고 배운 것 역시 모두 군대의 법도와 같은 것이다.(해유록(海遊錄) 중에서)” 일본사람들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선진국이라서라기보다는 군사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정치의 안정 속에서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전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들어온 은 제련기술을 이용해 전국의 은광을 채굴했다. 그 양은 전 세계 생산량의 3분의1에서 4분의1에 달하는 막대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국제무역, 특히 명나라·청나라와 활발하게 무역할 수 있었고 국내 상업도 크게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주로 실크·도자기·차·서적 등 하이테크 상품들이 대량으로 수입됐다. 이로써 기모노·다도 등 일본의 ‘전통’ 문화들이 꽃피게 됐다. 벼농사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경지면적이 크게 늘어난데다 농업기술과 비료가 이를 촉진했다. 이때 이미 일본은 부유한 나라가 됐다. 이 같은 경제발전은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연결됐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자.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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