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와 국제화 속에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치솟은 ‘뜨거운’ 시대였다. 시대를 반영한 예술도 그랬다. ‘탈춤’ 등의 목판화로 유명한 오윤(1946~1986)의 1980년작인 ‘마케팅Ⅰ-지옥도’는 불화의 지옥도 형식을 빌려 소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특정 브랜드의 광고판이 노골적으로 눈길을 끄는 이 작품을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보면 형틀에 갇힌 인물들이 꽤 구체적으로 묘사됐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된 당시 미술평론가 윤범모를 비롯해 성완경·원동석이며, 매서운 눈매의 작가 자화상도 들어있다.
신간 ‘1945년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저자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역사상 유례없이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미술이었던 민중미술은 1980년대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고, 민주화가 확산되고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소멸됐다고도 할 수 있다”면서 “민중미술은 미술과 삶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 운동이었다”고 짚었다.
국내 미술사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학자 중 한 명인 저자는 새 책에서 해방 이후 2010년대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정리했다. 그간 한국미술계가 현대미술의 시작을 모더니즘적 추상미술로 전환하는 1957년으로 본 것과 달리 저자는 1945년을 시작점으로 잡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의 현대미술은 양식 수용과 같은 순수한 내적 논리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정치적인 전개에서 영향을 받았다”면서 “격동적인 현대사에서 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역사의 기억은 여러 가지 주제나 징후로 미술에 드러나거나 표현됐기 때문에 미술의 흐름만으로는 논술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1945년 이후의 한국 현대미술을 정치 사회적 요소와 미술의 변화를 복합적으로 판단해 크게 네 시기로 구분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정치·사회의 변천과 미적 가치 양쪽 측면에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해 그 특징을 설명한다. 1945~1957년 해방 후의 한국미술은 미술계의 재편과 새로운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이후 1975년까지는 추상미술이 확산하고 매체의 확산 등 다양한 미술에의 도전이 있었지만 동시에 국가 주도의 공공조각과 민족기록화 등이 추진됐다. 이후 1990년까지는 ‘한국미술의 정체성 찾기’가 화두였고 단색화와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와 백남준에 대한 주목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90년 이후는 새로운 문화환경 속에 ‘글로벌 세대’가 활약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북한 미술을 별도로 다루고 있다. 치우침 없이 균형감 있게,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 눈에 보여준다. 3만원.